가계부채 뇌관된 전세대출, 병주고 약준 정부 [기자수첩]

기사승인 2021-11-09 06: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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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부채 뇌관된 전세대출, 병주고 약준 정부 [기자수첩]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돼 있다”

대표적인 자유주의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가 남긴 유명한 어록이다. 좋은 의도로 추진한 정책 혹은 행동이 오히려 나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현 정부의 전세대출 정책을 보면 하이에크의 어록이 떠오르곤 한다. 의도는 좋았으나 부작용이 너무 컸다. 

문재인 정부는 집권 초기 전세난민 해결과 저소득층의 주거안정을 위해 전세자금 대출을 완화했다. 하지만 의도와 달리 갭투자를 부추겼다. 주택담보대출을 강화하자 자금 흐름이 전세자금대출로 흘러가면서 갭투자를 활성화 시킨 것이다. 특히 상환 능력이 떨어지는 20~30대 청년세대의 갭투자가 급증했다. 최근 1년 4개월여 동안 서울에서 집을 산 20~30대 매수자 가운데 절반 이상이 전세를 ‘갭투자’한 것으로 나타났다. 

국토교통부의 ‘자금조달계획서 심층분석 자료’(2020년 기준, 서울 지역 19만3974건)를 분석한 결과 지난해 3월부터 올해 7월까지 서울에서 집을 산 39세 미만(0~39세) 6만3973명 가운데 기존 세입자 임대보증금을 떠안은 사람이 3만3365명으로 52.2%를 차지했다. 특히 20대 매수자 중 갭투자 비율이 71%나 됐다. 30대는 49%가 갭투자로 집을 샀다.

주택시장의 과열은 가계부채에도 영향을 미쳤다. 한국은행의 ‘2021년 2분기 중 가계신용’ 자료에 따르면 2분기 말 가계부채(신용카드 사용액 포함) 잔액은 1805조9000억원으로 1분기보다 41조2000억원 증가했다. 특히 주택시장 과열 시 1년 이상 지속될 경우 2023년 말 국내 가계부채 규모는 4000조원(GDP 대비 192%)으로 증가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문제는 정부부채 위주의 선진국 정책과 달리 가계부채를 통한 경기 부양 정책이었다는 것이다. 특히 단기성 레버리지로 불리는 임대보증채무 비중이 크게 늘어났다. 임대보증채무가 증가한 배경에는 정부의 전세자금대출 완화 정책이 영향을 미쳤다. 임대보증금을 포함한 실질 가계부채는 전 세계 최고수준인 GDP 대비 140%를 상회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현재 담보대출 가운데 전세대출 비중이 크고 갭투자 비율은 52%에 달한다. 

가계부채 상황이 위험수위로 올라가자 금융당국은 규제 카드를 꺼냈다. 금융당국이 내년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규제 강화를 앞두고 올해 연말에도 가계부채에 대한 엄격한 관리 기조를 이어가기로 함에 따라 전세자금 및 잔금 대출의 심사가 강화했다.

시중 은행은 잔금 지급일 이후 전세자금 대출 취급을 원칙적으로 중단했다. 이어 1주택자 대상 비대면 전세자금 대출 취급도 멈췄다. 전세 갱신 시에 대출 가능 금액을 보증금 증액 이내로 축소했다.

결국 정부의 정책 미스로 인한 피해가 고스란히 내 집 마련이 필요한 실수요자나 전세난민에게 전가된 것이다. 그럼에도 갭투자를 부추길 수 있는 다세대주택의 규제는 여전히 완화하고 있다.  최근 서울시가 다세대·연립주택(2종 일반주거지역)에 대해 용적률을 높이는 규제 완화 방안을 발표했다. 

문재인 정부는 출범 초기부터 부동산 시장 안정화를 정책 기조로 삼았다. 하지만 현재 문재인 정부 말기 부동산 시장과 금융시장은 어느 때 보다 과열된 상황이다. 이는 냉탕과 온탕을 오가는 일관성 없는 정책 기조에서 비롯됐다고 볼 수 있다. 

‘정부는 시장을 이길 수 없다’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보다 장기적인 안목과 다양한 정책 플랜이 부재했던 점은 아쉬움이 남을 수 밖에 없다. 서민의 주거안정을 목표로 한 전세대출 완화 정책이 갭투자 과열로 변질된 것은 두고두고 곱씹을만한 부분이다. 

유수환 기자 shwan9@kukinews.com 기사모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