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젊은이들이 집을 안 사는 이유 [쿠키칼럼]

도쿄 집값이 서울보다 훨씬 싸지만
수도권 절반 이상 비싼 월세 부담
빈집 늘어도 리스크 너무 커 기피
젊은 세대에게 집은 꿈 아니라 짐

기사승인 2023-01-24 12: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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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젊은이들이 집을 안 사는 이유 [쿠키칼럼]
일본 도쿄의 오래된 아파트


“일본인은 토끼 굴처럼 형편없는 집에서 산다”는 말이 있다. 그 정도로 좁게 산다. 월세도 세계적으로 비싼 나라가 일본이다.

내가 사는 도쿄의 경우 전철역에서 가까운 9~10평 남짓의 원룸에 살려면 한달에 10~15만엔의 월세를 내야 한다. 방이 2개이상인 패밀리타입 아파트는 20만엔이 넘는다. 검소하기로 소문난 일본인이지만 월세만큼은 자기 수입의 1/3까지 낼 각오를 해야 한다.

월세가 끝이 아니다. 월 10만엔의 원룸을 계약하는 경우 첫달에는 월세+보증금+사례금(일본에서는 임대인에게 집을 빌려줘서 감사하다는 사례를 한다!)+중계 수수료를 내야 한다. 월세의 4~6배가 되는 돈이 필요하다. 여기에 임차인 부담의 화재보험, 퇴거시 청소 비용과 부동산 업자들이 빼곡하게 책정한 각종 수수료들까지 부담해야 한다. 이사를 가지 않더라도 2년마다 돌아오는 계약 만기 때에는 갱신료를 내야 한다. 덕분에 주기적으로 이사를 다니거나 갱신료를 내고 나면 통장 잔고는 항상 빠듯하다.

한국의 국민평형이 84㎡인데, 일본은 70㎡가 각종 조사나 시세의 기준이 되는 국민평수다. 최근 NTT리서치의 조사에 따르면 도쿄나 수도권에 거주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70㎡ 이하에 산다. 토끼 굴까지는 아니지만, 어느 쪽이든 일본의 집들은 크지 않다. (물론 아주 비싼 집은 아주 넓다.) 한국인보다 좁은 집에 살면서 월세 부담은 훨씬 많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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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렇게 쇼핑몰 근처에 초고층으로 올린 고급형 아파트도 있다. 흔히 타워맨션이라고 부른다.


돈 한푼 없이 내집마련이 가능하다고?

집값은 한국보다 일본이 싸다. 

부동산 감정평가 회사 토쿄칸테이가 지난 해 말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토쿄의 아파트 평균 가격은 6399만엔(약 6억1천만원)이다. 토쿄 외곽 수도권은 평균 4807만엔(약 4억6천만원)이었다.  단독주택은 더 낮다. 토쿄 평균이 5332만엔(약 5억), 수도권 평균은 4381만엔(약4억1천만원)이었다. (보통 일본에서 맨션이라고 부르는 주거형태가 한국의 아파트에 해당한다. 일본에서 아파트라 지칭하는 집은 연립주택 같은 형태다.) 

10억원이 훌쩍 넘는 아파트들이 즐비한 한국의 수도권에 비하면 일본의 집값이 확실히 저렴하다. 물론 도쿄 중심지에는 초고가 아파트도 있지만, 6억원 정도면 도쿄 시내에 20평 안팎의 아파트를 가질 수 있다.

대출도 한국보다 부담이 적다. 이 글을 쓰고 있는 2023년 1월의 일본 시중은행의 35년 장기 주택담보대출 금리를 확인해보니 무려 연0.3%다. 저렴한곳은 0.2%대도 있다. 집값의 100%를 넘어 등기를 비롯한 비용까지 포함해 대출이 가능하다. 누구나 가능한 건 아니지만 경우에 따라 돈 한푼 없이 집을 살 수 있다. 신축 주택을 사면  5년간은 재산세 절반을 감면 받는 혜택도 있다.

한국보다 집값도 싸고 대출금리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데다 세제해택까지 누릴 수 있다. 이정도면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도대체 주택을 구입하지 않을 이유가 없어 보일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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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도쿄 시내의 임대 전용 아파트. 일본에는 부동산 전문 회사가 소유하고 빌려주기만 하는 아파트들이 흔하다.


재산이 아니라 리스크가 된 집

도쿄와 수도권의 내집 마련 비율은 44%(일본 총무성 주택 토지 통계)다. 토쿄에 사는 사람들중 절반 넘는 사람들이 남의 집을 빌려 비싼 월세를 내면서 살고 있다. 특히 2030 젊은 세대에서 임대주택 선호가 더 두드러진다.

왜 일본인들은 임대주택을 선택하는걸까?

얼핏 보면 일본에서 내집 마련이 더 쉬워 보이지만 따져보면 쉽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우선 주택담보대출의 심사기준이 꽤나 까다롭다. 대기업에 다니는 고연봉자가 아니면 대출 가능 금액이 줄어들고, 금리도 달라진다. 모두가 동일하게 제로 금리의 이점을 누리는게 아니다.

단체신용생명보험을 가입해야 하는 관문도 있다. 개인이 주택 담보 대출을 할 때 대부분의 은행에서 요구하는 보험이다. 집주인이 죽거나 사고를 당해 대출금을 갚을 수 없게 되었을 때를 대비한 보험이다. 건강에 이상이 있으면 보험 가입이 거절된다. 그러면 대출도 못 받는다.

아파트를 사고 나서도 매달 내야 하는 관리비와 장기수선충당금이 보통 수십만원이다. 여기에 주차장까지 별도로 빌려야 하는 경우가 흔하다. 내집이지만 매달 들어가는 돈이 어지간한 원룸 월세 비용 정도가 된다.

불안한 비정규직 일자리가 늘어나나다 보니, 덜컥 내집을 마련했다가 집값이 떨어지거나 소득이 줄기라도 하면 살림이 고통스러워진다. 차라리 빌려 살면 경제 상황에 따라 월세가 더 싼 곳으로 옮길 수도 있다. 영원히 우상향할 것 같던 부동산 신화가 무너지는 것을 경험한 일본인들에게는 이제 35년 장기 주택담보 대출을 받아 집을 산다는 행위는 위험한 선택이 돼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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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고 작은 건물이 빼곡히 자리한 도쿄 시내 전경. 노무라부동산 홈페이지 캡쳐

버블 붕괴와 월세 세대의 등장

일본도 이미 연공 서열이나 종신 고용의 시대가 버블 붕괴로 끝났다. 이제는 조기 퇴직은 물론이고 비정규직이 나날이 늘어나는 세상이 되었다. 

한국보다 빨리 닥친 인구 문제로 지방 소멸이 현실화되고 있다. 도쿄권의 일극화(한마디로 도쿄만 잘나간다는 이야기)로 전국에서 빈집이 늘어나고 있다. 빈집은 유지관리를 포기하고 세금만 내는 셈인데, 부수고 싶어도 비용이 든다. 상속을 받아 봐야 부담이다. 이 정도면 내집을 갖는다는 건 더 이상 가족의 꿈이 아니다. 이미 도시로 떠난 가족의 짐이 된 지 오래다.

입지 좋은 도심지의 좋은 주택을 초저금리로 구매할 수 있는 사람들은 소수다. 젊은 층은 불안한 비정규직 일자리와 저임금으로 내집마련을 점점 포기하고 혹독한 월세를 견디며 임대주택을 전전하는 `월세 세대'가 되어 버렸거나 부모에게 얹혀 사는 형편이다. 독립한 젊은 세대도 점점 외곽으로 밀려난다. 

요즘 일본 언론에서는 한국의 부동산 침체를 중요 뉴스로 다루고 있다. 버블 붕괴 후의 일본 풍경은 한국인에게도 다가올 미래일까. 한국의 미래는 적어도 지금의 일본과는 다르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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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열도 끝에 선 필자


김동운

1978년 서울출생.  일본계 모터싸이클 회사의 한국지점 입사를 계기로2008년 일본으로 넘어와 글로벌 IT기업의 마케팅부서에서 근무하며 한일 양국에 한 발씩 걸친 경계인으로 살고 있다. 현재거주지는 시노노메(東雲). 김동운은 필명이다.
icaroos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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