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아리 텍사스' 골목에도 봄이 왔다 [쿠키칼럼]

재개발로 쓸려 나갈 허름한 동네의 초록 풍경

기사승인 2023-04-20 13: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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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고 있는 집과 내가 일하는 ‘건강한 약국’은 빨리 걸으면 1분이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있다. 1분이면 충분할 출근시간에 30분 이상을 할애하고 있다.

재개발로 인해 커다란 불도저가 언젠가 쓸어버릴 귀하고 사랑스런  하월곡동 88번지 공간을 내 눈과 내 마음에 담기 위함이다. 재개발 때문에 꽤 오랜 세월 수리를 하지 않은 건물이 많아서 옛 흔적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
'미아리 텍사스' 골목에도 봄이 왔다 [쿠키칼럼]
다정한 이웃이 사는 '미아리 텍사스촌' 골목 풍경. 성매매 집창촌이라는 따가운 시선을 받고 있다. 사진=이미선 

각각의 색깔이 다른 낡은 기와지붕과 낡은 대문들, 그리고 작은 창들과 수십 년 세월과  사람의 흔적이 가득한 화단들이 옹기종기 동네골목을 채우고 있다.화단의 모습은 다양하고 따스하여 눈길이 많이 간다.

흙을 만지며 맨땅을 디딜 수 있는 공간은 전혀  없지만 낡은 스티로폼 박스와  넓은 대야와 아기목욕그릇 등등 다양한 것들에 흙을 채워 자신만의 밭을 만든 사람들이 꽤 많다. 자신이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들을 어떻게 만나고 가꾸는지, 다양한 화단들의 모습 속에서 많은 이야기를 읽을 수 있음이 흥미롭다.

자기가 사랑하는 그 어떤 것에 어떻게 자신의 마음을 전달하는 지 소박한 사람들은 천성적으로 알고 있는 듯하다. 하월곡동 88번지는 미아리텍사스 성매매 집창촌이라 하여 모두의 따가운 시선을 받고 살아가는 암울한 동네.

그래서 이 동네에는 햇살 한줌 들지 않을 것 같지만  이 마을에도 햇볕은 가득하고 살랑살랑 실바람도 불고 있고 소담스런 꽃이 피고 초록의 줄기가 담을 넘어 자신만의 동굴을 만들기도 한다.
'미아리 텍사스' 골목에도 봄이 왔다 [쿠키칼럼]
서울 속칭 '미아리 텍사스' 동네. 골목에 사는 부지런한 사람들이 봄을 가꾼다. 사진=이미선

사철나무가 저리 예쁜 꽃을 피우고 또 발그레한 열매를 맺는다는 사실에 놀라기도 했다.탐스런 사철나무는 골목 세탁소 아저씨네 작은 마당 안에서 잘 자라고 있다. 수십 년 된 세탁소와 동갑이라는 사철나무가 자리한 마당에는 넝쿨장미와 작은 라일락나무가옹기종기 모여 앉아 소담스런 꽃 마당을 이루고 있다.

오래된 마을 인 탓에 작은 골목들이 여러 개 있다. 차로는 다니기 어렵고 배달오토바이와 사람이 겨우 다닐 수 있는 작은 골목은 참으로 많은 이야기와 세월을 고스란히 품고 있다.

우리 약국에서 가장 가까운 첫 골목에는 부지런하고 정갈한 분들이 살고 계신다. 동네에 많은 길고양이들이  살고 있다. 고양이들은 실외 배변습관을 가지고 있어서 큰 화분들은 고양이들의 화장실로 이용될 수 있기에 다양한 방법으로 고양이의 화단 침입을 막고 있다.

촘촘히 작대기를 세운 할아버님의 화단은 가장 일찍 햇볕을 받는다. 오토바이도 타고 다니기 편하게 고치셨고 사각 오토바이의 모습은 큐브 같아 귀엽다. 늘 무언가를 만드시고 일하시는 부지런한 어른이시다.

구이용 석쇠로 화단을 막은 ‘깔끔 아주머니’의 고추 밭. 작년에도 그 전해에도 늘 부지런히 농사를 지으시고 빗물이나 냉방기물 까지도  잘 갈무리 하셔 항상 깔끔한 화단의 모습을 보게 된다. 올 여름에도 고추 몇 알을 얻어먹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얼굴에 미소가 가득해 진다.

약사 이미선 
1961년 생. 서울 성북구 하월곡동에서 태어나 현재 하월곡동 88번지에서 26년 째 '건강한 약국' 약사로 일하고 있다. '하월곡동 88번지'는 소위 '미아리텍사스촌'으로 불리던 집창촌이다. 이 약사는 이 곳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이들에게 '약사 이모'로 불린다. 그들을 위해 '사회복지사' 자격도 취득하여 주민 상담, 지역 후원사업 등을 전개하고 있다. "아주 조금이라도 사회에 보탬이 되는 삶을 살고 싶다"는 소망을 밝혔다. ms6445@hanmail.net 기사모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