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개발자라면 꼭 봐야 하는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 [쿠키칼럼]

기사승인 2023-04-28 09:5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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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키칼럼-이유원]

스무 살이 되고 나서부터 혜화 근처에 거의 6년을 혼자 살았다. 보통 자취를 처음 시작하는 거의 모든 학생들이 그렇듯, 처음엔 집과 가족들에게서 벗어났다는 기쁨에 설레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내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새벽의 대학로였다. 차가운 밤공기를 가르며 본래였다면 인파로 가득할 대학로를 나 홀로 거니는 것은 묘한 카타르시스를 안겨주었다.

특히나 좋았던 것은 바로 심야 영화였다. 새벽 1시쯤 느지막이 자취방에서 나와 터덜터덜 조금 걸으면 대학로 CGV가 있었다. 낮과 저녁에는 가족들, 커플들로 북적이지만 새벽엔 찾는 이가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꾸준히 매일 심야 영화를 상영했는데, 덕분에 텅 빈 상영관에서 혼자 영화를 볼 때도 많았다.

게임 개발자라면 꼭 봐야 하는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 [쿠키칼럼]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 장면.   와이제이엠게임즈

거대한 상영관 한가운데에서 나만을 위해 준비된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그 영화가 전하려는 모든 감정과 메시지가 유독 더 크고 진하게 느껴진다. ‘레디 플레이어 원’도 그랬다. 24살에 혼자 상영관에서 본 그때의 감정과 기억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스티븐 스필버그 제작 레디 플레이어 원은 오아시스라고 불리는 가상 현실 게임에 관한 이야기다. 영화를 보기 전에, ‘스티븐 스필버그가 얼마나 서브컬쳐를 좋아하는지에 대해 영화로 그 팬심을 표현한 것’이라는 평을 들은 적이 있었다. 가히 맞는 말이었다. 화려한 액션과 수많은 오마주, 또 섬세하고 독창적으로 구현된 가상 현실 게임 공간은 ‘게임 덕후’들의 가슴을 뛰게 할 만했다. 참고로 트레이서, 짐 레이너, 메르시, 춘리, 고든 프리먼, 마인크래프트의 스티브, 소닉 등 수많은 캐릭터들이 장면 중간중간에 카메오로 등장한다. 한 시도 눈을 뗄 수 없다.

줄거리 전체는 평범하지만, 게이머들의 게임에 대한 사랑과 열정이란 소재를 유치하지 않고 세련되게 풀어냈다. 영화 전체가 화려한 볼거리와 함께 끊임없는 도전과 성취를 반복하는 하나의 게임처럼 만들어졌고, 그러한 연출력 덕분에 결말 부분에서는 짜릿한 카타르시스도 느끼게 한다.

그러나 특히 내 기억에 남았던 것은 ‘할리데이의 저널’이다. 작중 배경이 되는 게임 ‘오아시스’를 개발한 천재 할리데이는 자신의 모든 추억과 경험을 ‘저널’이라고 불리는 건물에 도서관처럼 보관했는데, 이곳이 주인공이 게임 속 비밀을 파헤치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자기 자신을 게임에 남긴다는 것은 게임 개발자에게 얼마나 기쁘고 뿌듯한 일인가. 게임을 진정 예술로 대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그보다 더한 축복은 없을 것이다. 사람들이 아이를 낳아 기르고, 화가들이 그림에 자신의 혼을 불어넣듯, 게임 개발자에게도 자신의 창작물에 그 못지 않은 애정을 쏟고 자아를 부여한다. 레디 플레이어 원은 이 메시지를 저널이라는 실제 물리적인 공간으로 형상화하여 영화의 중요한 메시지를 풀어나가는 소재로 삼았다.

영화를 다 보고 다시 털레털레 텅 빈 대학로를 걸어나오면서, 가슴이 뛰는 걸 멈출 수 없었던 것 같다. 당시에 진로에 대한 걱정이 무척 많을 때였는데,  소위 ‘개발자뽕’이 찼다. 내가 하는 일이 나와 세상에 얼마나 의미가 클 지를 진지하게 생각해본 것 같다. 

게임을 만들어나가면서 자신감을 잃을 때가 종종 있는데, 그 때마다 이 때의 벅찬 기억을 떠올리면 정말 큰 힘이 된다. 모든 게임업계인들에게도 나처럼 자신만의 레디 플레이어 원이 있을 것이다. 누군가에겐 어릴 때부터 즐겼던 오락실일 수도 있고, 친구들과 함께 밤을 샜던 온라인 게임일 수도 있다. 현실의 벽과 싸워가면서도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우리 모든 게임 창작자들을 응원한다.

글을 쓰다 보니 그때의 감동이 또 떠오르는 것 같다. 빨리 게임 만들러 가야지. 설렌다.
게임 개발자라면 꼭 봐야 하는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 [쿠키칼럼]
이유원 반지하게임즈 대표

이유원
1995년생. 초등학생 때부터 독학으로 인디게임을 만드는 것을 좋아하던 아이는 어느새 3년차 게임회사 대표가 되었다. 성균관대학교 글로벌리더학부를 졸업하고, '아류로 성공하느니 오리지널로 망하자'는 회사의 모토를 받들어 올해 성균관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을 자퇴했다. 게임 기획자로서 '허언증 소개팅!' '중고로운 평화나라'  '서울 2033' 등 기존에 없던 소재와 규칙의 게임을 만드는 것을 즐긴다. NDC, G-STAR, 한국콘텐츠진흥원, 성균관대학교, 연세대학교, 지역 고등학교 등 다양한 곳에서 인디게임 기획과 인터랙티브 스토리텔링 장르에 대해 강연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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