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행 기차 안에서 내내 울었다

[지리산웰빙팜] 농사꾼 임송의 귀농일기(30)
농촌에 살았던 사람이 다시 농촌으로 돌아가는 '귀농'

기사승인 2023-07-10 10: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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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군과 백군으로 나뉘어 모자를 다부지게 눌러쓰고 기마전 하던 아이들, 어깨에 두른 긴 끈에 하얀 엿판을 매달고 큰 가위를 쩔렁거리며 호객하던 엿장수, 공기를 넣으면 오이 모양으로 부풀어 오르던 색깔 고운 풍선들, 긴 장대에 매달린 종이 박을 먼저 터뜨리기 위해 조그만 모래주머니를 정신없이 던지던 아이들, 물건 옮기는 시커먼 짐 자전거 위에 올라가 경기를 지켜보던 사람들. 1960년대 후반 시골 초등학교 운동회 풍경이다.
서울행 기차 안에서 내내 울었다
내가 초등학교 3학년 운동회 전날까지 다녔던 충남 서천 장항초등학교. 흙바닥 운동장은 잔디 운동장이 됐다. 사진=임송

그 당시 초등학교 운동회는 마치 요즘의 ‘지역 축제’처럼 지역민 모두가 참여하는 큰 행사였다. 게다가 나는 운동회 하이라이트인 릴레이 주자로 이미 선발된 상태였다.

이런 운동회를 하루 앞두고 우리 가족은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공무원이셨던 아버지가 근무처를 서울로 옮기는 바람에 가족이 서울로 이주하게 됐던 것.

그 당시 나는 서울로 이사한다는 것이 내 인생에 어떤 의미인지 전혀 알 수 없었고 관심도 없었다. 그저 내 머릿속은 온통 운동회 생각뿐이었다. 얼마나 서운했으면 50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때의 안타까움이 아직도 느껴지겠는가. 나보다 일곱 살 아래인 남동생이 내 울적한 마음을 대변하듯 서울행 기차 안에서 내내 울었다.

‘귀농’은 한자로 돌아갈 ‘歸’에 농사 ‘農’으로, 농사로 돌아간다는 뜻이다. 그 뜻대로라면 예전에 농사일이나 적어도 농촌에 살았던 사람이 도시에서 살다가 농촌으로 돌아가는 상황에 해당하는 말이다.
서울행 기차 안에서 내내 울었다
충남 서천군 장항읍 중심가. 내가 초등학교 시절 비포장 도로였다. 하지만 도로는 옛 그대로다. 사진=임송

그런데 현실에서는 농사와 무관한 사람이 농촌으로 이주했을 때도 귀농했다고 한다. 평소 이 단어의 쓰임새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서울 인구에 관한 통계를 보면서 이 의문이 해소됐다. 1945년 서울 인구는 90만명에 불과했다. 이후 1955년 150만명, 1965년 347만명, 1975년 689만명, 1985년 964만명, 1995년 1066만명으로 정점을 찍고 이후로는 감소하는 추세다. 2022년 기준으로 942만명이 서울에 살고 있다고 한다.

불과 100년도 안 되는 기간에 서울 인구가 10배 이상으로 불어난 것이다. 그 많은 사람이 다 어디서 모여들었을까?

위 통계에 따르면, 현재 서울에 사는 사람 중 서울에서 대대로 살아온 소위 ‘서울 토박이’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서울 인구 대부분은 나처럼 60~70년대에 아버지나 할아버지 손에 이끌려 농촌에서 서울로 이주한 사람이거나 그 자손들이다.

이런 사정은 비단 서울뿐만 아니라 수도권(경기도와 인천까지 포함하면 우리나라 전체인구의 반이 넘는다)이나 지방 도시의 경우도 비슷하다.

그러니 예를 들어 엄마 손잡고 서울로 이주했던 사람이 오랫동안 서울에 살다가 다시 농촌으로 이주한다고 하자.

비록 자신은 농사와는 무관하게 살았더라도 집안 전체로 보면 ‘농촌으로 돌아간다’는 귀농이라는 말이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 않은가.

나는 서울에서 초, 중, 고, 대학을 졸업하고, 10여 년 전 지리산으로 내려오기 전까지 직장생활도 서울에서 했다.
학교도 초등학교부터 서울에서 나오고 근 40년을 서울에서 살았으니 외견상으로는 서울 사람이라고 할만하다.

하지만 내가 태어난 곳은 충남 서천군 ‘장항’이라는 인구 만 명이 조금 넘는 읍 단위 지방 소도시다. 빈 도화지 같았던 내 머릿속에 왕성하게 그림이 그려지던 시절, 나는 ‘장항’에 있었다.

마음속 일이라 단정할 수는 없지만, 내 머릿속에는 어린 시절에 봤던 자연환경이나 사람들 모습이 깊게 각인됐을 테고, 이후 도시에서 거기에 수많은 그림이 덧칠해졌어도 그 원형은 변하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그래서 10여 년 전 농촌으로 이주했을 때 주변 환경이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예전에 아내로부터 동료 교사가 회식 자리에서 술이 거나해지자 했다는 말이 생각난다.

“전북에서만 살다가 교사 임용고시에 돼서 30대에 서울에서 7년간 교사 생활을 했어요. 서울에서 사는 동안 하루도 마음이 편한 날이 없었어요. 그러다 고향으로 돌아오니 그렇게 마음이 편할 수가 없더라고요.”

타향살이가 얼마나 고단했으면 7년간 단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을까. 나도 타향살이를 경험해 보니 시골 출신들이 서울에 올라가 사는 일이 얼마나 고단한 일일지 상상이 된다.

그러다 문득, 혹시 내가 서울에 살면서 느꼈던 불편함도 어릴 때 시골에 살았기 때문은 아닐까 라는 의문이 생긴다.

마음속으로 가만히 서울 살면서 가장 불편했던 점을 헤아려본다. 우선 탁한 공기, 소음, 메마른 인간관계 세 가지가 떠오른다. 세 가지 모두 산업화로 자연환경이 훼손되고 익명성이 강조되는 전형적인 대도시의 병폐가 아니던가.

도시에 살면서 그것들이 제일 불편했다면 “맞네, 맞아, 나 촌놈 맞네.”

◇ 임송
중앙대 정외과를 졸업하고 미국 유펜(Upenn)대학 대학원에서 사회정책학을 공부했다. 1989~2008년 경제기획원, 공정거래위원회, 국가인권위원회 등에서 공직 생활을 했다. 부이사관으로 퇴직 후 일용직 목수를 거쳐 2010년 지리산(전북 남원시 아영면 갈계리)으로 귀농해 농사를 짓다가 최근 동네에 농산물 가공회사 '웰빙팜'을 설립했다.

jirisanproduce@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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