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 그 이상을 해낸 ‘오펜하이머’ [쿡리뷰]

기사승인 2023-08-14 18:5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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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 그 이상을 해낸 ‘오펜하이머’ [쿡리뷰]
영화 ‘오펜하이머’ 스틸컷. 유니버설 픽쳐스 

한 천재는 유독 학교에 적응하지 못했다. 학우들과 섞이지 못하는 데다, 신경 쇠약에 시달리다 교수의 책상 위 풋사과에 독을 주사할 정도로 기행을 벌였다. ‘성과는 별로여도 똘똘한 애.’ 세상만사에 겉돌던 그는 독일로 향해 물리학도로서 두각을 나타낸다. 수년 뒤 그는 맨해튼 프로젝트의 책임자로서 핵폭탄 개발을 진두지휘한다. 미국 양자물리학의 선구자로 꼽히는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이야기다.

오펜하이머의 전기 영화 ‘오펜하이머’(감독 크리스토퍼 놀란)는 그의 생애를 집약적으로 다룬 작품이다. 책으로 발간된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 로버트 오펜하이머 평전’을 기반으로 한다. 영화는 오펜하이머(킬리언 머피)의 삶을 학창 시절과 맨해튼 계획, 청문회 등으로 나눠 접근한다. 각기 다른 시간선을 흑백과 컬러로 나눠 자유로이 넘나든다.

상상 그 이상을 해낸 ‘오펜하이머’ [쿡리뷰]
‘오펜하이머’ 스틸컷. 유니버설 픽쳐스 

명장으로 익히 알려진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장기가 어느 때보다도 빛난 영화다. 상영시간 동안 놀란 감독은 색감부터 화면 비율, 음향과 음악 등을 주무르며 관객을 영화 속 세계로 끌어당긴다. 경지에 다다른 연출력이 긴 상영 시간 동안 펼쳐지니 몰입감이 살아나는 건 당연지사다. 인물의 감정과 상황에 따라 화면 비율이 자유자재로 변하고, 큰 폭발음이 들릴 만한 순간에는 의도적으로 모든 소리를 지우거나 생활 소음만 남기며 현실과 비현실을 포괄한다. 놀란 감독의 연출에 따라 관객의 감상 역시 요동친다. 볼수록 장면이 주는 충격은 배가되고 인상은 더욱 깊어진다.

극은 오펜하이머가 겪은 주요 사건을 함축적으로 다룬다. 학창 시절 겉돌던 괴짜 학생이 양자물리학의 불모지였던 미국으로 향해 학문을 번영케 하는 모습, 공산주의 등 여러 이념에 관심 두던 학자의 면모, 로스 앨러모스에서 진행한 맨해튼 프로젝트, 그 이후의 쇠락… 오펜하이머 역을 맡은 킬리언 머피는 걸출한 연기로 극 전체를 이끌며 캐릭터로서 온전히 기능한다. 오펜하이머의 여러 감정을 세밀하게 표현하는 솜씨가 일품이다. 빨간색의 낌새만 보여도 직장에서 쫓겨나던 시대, 일탈을 일삼는 천재의 자신감 넘치는 눈빛부터 죽음의 신이자 세상의 파괴자가 된 이후의 죄책감까지 그가 표현하는 감정의 진폭은 넓고 풍부하다. 핵폭탄으로 수많은 희생자가 나온 뒤, 환호하는 청중 앞에서 느끼는 내면의 고통을 표현한 장면이 특히나 인상적이다. 대형 스크린에 한가득 담기는 그의 눈빛에는 진실한 감정만이 꿈틀댄다. 감탄만 나오는 연기를 거뜬히 해낸다.

상상 그 이상을 해낸 ‘오펜하이머’ [쿡리뷰]
‘오펜하이머’ 스틸컷. 유니버설 픽쳐스 

컴퓨터 그래픽(CG)을 사용하지 않은 화면은 충격적으로 아름답다. 별의 수축과 팽창을 묘사한 장면부터 핵분열과 폭발, 무의식과 초자연의 세계, 우주와 양자물리학을 형상화해 표현하는 대목은 경이로움 자체다. 일품인 건 영화의 클라이맥스인 핵폭탄 폭발 실험 장면이다. 놀란 감독은 음악만으로도 긴박한 분위기와 긴장감을 끌어올린다. 한껏 고조되는 음악이 순식간에 지워지고 자잘한 현장 소음만 남자 기이한 몰입감이 돋아난다. 폭발하는 불꽃, 버섯 모양으로 피어오르는 연기, 등장인물의 눈만을 비추는 장면 전환이 압권이다. 실제로 구현한 화염의 움직임이 도드라진다. 무시무시하고 황홀한 암전 이후 터져 나오는 함성을 들을 때면 현장에 자리한 듯한 착각마저 들 정도다. 실험 성공 후 모두가 느끼는 고양감이 스크린을 뚫고 전해질 때면 전율이 인다. 

‘오펜하이머’는 놀란 감독의 뛰어난 연출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제값을 하는 영화다. 여기에 킬리언 머피를 비롯해 루이스 스트로스를 연기한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키티를 맡은 에밀리 블런트 등 배우들이 펼치는 명연기가 보는 재미를 더한다. 인공적인 화면 연출 없이 실사를 고집한 결과물 역시 뛰어나다. 아이맥스로 보면 영상미에 풍덩 빠지는 느낌을 만끽할 수 있다. 3시간에 달하는 상영시간은 장벽이다. 이를 만회하는 건 놀란 감독이 선사하는 다채로운 영화적 경험이다. 상상 그 이상을 해낸 ‘오펜하이머’다. 상영시간 180분. 15세 이상 관람가. 15일 개봉.

상상 그 이상을 해낸 ‘오펜하이머’ [쿡리뷰]
‘오펜하이머’ 촬영 현장에 자리한 배우 킬리언 머피(왼쪽)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유니버설 픽쳐스 

김예슬 기자 yeye@kukinews.com 기사모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