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판에 엄마·아기 올린 모성애 실험…‘경성크리처’의 시작

기사승인 2024-01-11 14: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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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판에 엄마·아기 올린 모성애 실험…‘경성크리처’의 시작
‘경성크리처’ 속 배우 한소희(왼쪽), 박서준. 넷플릭스

껍질 벗긴 통나무, 마루타. 일본 731부대에서 머리가 빡빡 깎인 채 생체실험을 당하던 이들을 일컫는 말이다. 일본은 중국·러시아 등과 전쟁을 염려해 인간을 죽이기 위한 실험을 벌였다. 731부대가 자행한 생체실험이다. 군은 살아있는 사람에게 세균을 투입하고 신체를 얼리고 장기를 해부했다. 그중엔 모성애 실험도 있었다. 불로 달군 바닥에 엄마와 아이를 올려놓은 뒤, 엄마가 아이와 자신 중 누구의 생존을 우선시하는지 확인하는 실험이었다.

SBS ‘낭만닥터 김사부’ 시리즈 등을 쓴 강은경 작가는 이 모성애 실험을 보고 신작 퍼즐을 짜 맞췄다. 지난 5일 파트2가 공개된 넷플릭스 ‘경성크리처’가 그 결과다. 작품은 세계 제2차대전을 벌인 일본이 경성(서울)에서 조선인을 납치해 생체실험을 벌였다는 설정에서 출발한다. 주인공 윤채옥(한소희)의 엄마는 생체실험 피해자로, 기생충에 감염돼 괴수로 변한다. 10일 서울 안국동 한 카페에서 만난 강 작가는 “731부대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며 “매일 죽음을 직면한 사람들, 그 공포 속에서 일제강점기를 견딘 사람들의 이야기가 내겐 중요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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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은경 작가. 글라인

“시대 아픔 가진 괴수, 마냥 재밌게 그릴 수 없었다”

작품은 생체실험의 결과인 괴수를 스펙터클로 소비하지 않는다. “시대적 아픔을 가진 괴수를 시청자가 재미 요소로만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정동윤 감독의 판단 때문이다. 드라마는 괴수가 된 성심(강말금)이 생체실험 피해자임을 곱씹는다. 성심이 납치된 조선인들을 무차별 공격하는 장면은 그래서 흥미진진하다기보단 비극적이다. 정 감독은 “장르적 자극이나 재미만 추구하지 않으려고 했다”며 “(괴수를) 더 화려하고 무섭게 그릴 수도 있었으나 정박을 밟아가며 연출했다”고 설명했다. 괴수물과 결합한 식민시대의 아픔은 해외 시청자도 사로잡았다. 작품은 파트1 공개 후 3주 연속 비영어권 시리즈 글로벌 시청량 3위를 차지했다.

강 작가는 ‘경성크리처’를 쓰기 오래전부터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작품을 집필하고자 했다. 문제는 투자였다. 시대물은 제작비가 많이 드는데, 일본에서 분 한류 열풍 때문에 투자자를 찾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배우들도 선뜻 나서지 못했다. 일본 반응을 걱정해서다. KBS2 ‘각시탈’ 제작 당시에도 한류스타 등 배우 여러 명이 출연을 고사했다. 정 작가는 “‘(일본과) 분위기도 좋은데 굳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며 “글로벌 기업인 넷플릭스가 ‘경성크리처’를 함께 하자고 했을 때 많이 놀랐다”고 돌아봤다. 주인공 장태상과 윤채옥을 각각 연기한 배우 박서준, 한소희는 ‘앞으로 일본에 못 갈 수도 있다’는 각오로 작품에 참여했다고 한다. 정 작가는 “대본을 쓸 때부터 두 배우를 염두에 뒀다. 두 사람 모두 내 걱정이 무색할 만큼 흔쾌히 출연 제안을 승낙했다”며 고마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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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크리처’에서 일본 경무관 이시카와를 연기한 배우 김도현(왼쪽)과 정동윤 감독. 넷플릭스

생체실험 배상 책임 거부한 일본…“역사를 기억하는 우리가 살아있다”

일본에선 ‘경성크리처’를 보고 731부대 존재를 처음 알았다는 반응이 적지 않다. 일본 역사 교과서가 관련 내용을 보여주지 않아서다. 731부대는 최소 1만5000여명의 희생자를 냈으나 세상에 뒤늦게 알려졌다. 일본군은 제2차 세계대전 패색이 짙어지자 수용소를 폭파하고 남은 피실험자들을 독가스로 살해했다. 미국은 731부대의 생체실험 보고서 정보를 넘겨받는 대신, 도쿄재판에서 생체실험을 추궁하지 않기로 했다. 731부대 중국인 피해자들이 일본정부를 상대로 공식 사과와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냈지만, 일본 최고 재판소는 배상 책임이 없다고 판결했다. 온라인에서 “저들(일본군)이 저지른 일을 덮기 위해 숨기고 날조하고 왜곡하고”라거나 “저들은 세상 앞에 시치미를 떼겠지” 등의 대사가 ‘뼈 때린다’며 호응을 얻는 이유다.

강 작가는 “살아서 저들한테 계속 까끌까끌하게 생각나게 만들 것”이란 태상의 대사를 좋아한다고 했다. 그는 “있었던 일을 없었던 것처럼 여길 순 없다”며 “태상의 입을 빌려 과거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살아있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정 감독도 “아픔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전달하고 싶었다. ‘이런 사실이 있어. 어떻게 생각할래?’라고 질문하는 게 우리 작품의 온도”라고 부연했다. 작품은 한국사를 소재로 다뤘으나 인류 보편의 이야기로 확장할 가능성이 다분하다. 생체실험에 관여한 마에다(수현)와 태상의 대화가 이를 보여준다. ‘조선인이라 조선인 편을 드냐’는 마에다의 질문에 태상은 “인간이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정 작가는 “제목 속 크리처(괴수)엔 인류애가 배제된 폭압도 괴물이라는 정서가 담겼다”며 “올해 공개되는 시즌2에선 잔재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것”이라고 귀띔했다.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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