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공의 사직 국면에 등장한 ‘대마불사’는 바둑 용어

드라마 ‘미생’은 바둑 용어 ‘미생마(未生馬)’에서 영감
복기, 무리수, 승부수, 꽃놀이패 등 바둑 용어 노출 빈도↑

기사승인 2024-02-25 12:0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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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공의 사직 국면에 등장한 ‘대마불사’는 바둑 용어
박민수 보건복지부 2차관이 언론 브리핑 과정에서 ‘대마불사(大馬不死)’라는 바둑 용어를 언급하는 모습. 연합뉴스TV 갈무리

지난 21일 박민수 보건복지부 2차관은 언론 브리핑 과정에서 “대마불사라고 하나? 그런 생각들을 갖고 계신 것 같은데, 법은 원칙대로 집행한다”고 말하면서 전공의들의 조속한 현장 복귀를 촉구했다. 

이 과정에서 등장한 ‘대마불사(大馬不死)’는 바둑 용어다. ‘마(馬)’라는 용어는 바둑에서 주로 쓰이는 단어로, 바둑돌 하나 혹은 바둑돌로 형성된 한 무리 등을 일컫는다. 즉 대마불사는 큰 그룹으로 형성된 바둑돌은 죽지 않는다는 의미다. 

대마불사라는 바둑 용어는 1997년 외환위기 당시 대기업들이 휘청거릴 때 뉴스에 종종 등장한 이후 대형 그룹사나 금융지주 등이 어려움을 겪는 국면에서 주로 등장한다. 최근엔 의사들과 강경 대치를 이어가고 있는 정부가 ‘상황을 낙관하지 말라’는 뉘앙스의 경고용 멘트로 사용한 셈이다.

‘마(馬)’가 들어간 바둑 용어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미생마(未生馬)’다. 미생마는 바둑에서 살아 있지 못한 돌을 지칭하는데, 동명 웹툰 원작의 드라마 ‘미생’에선 다소 생소한 단어 ‘마(馬)’를 제외하고 미생 두 글자만 제목으로 가져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바 있다. 마를 활용한 사례를 하나 더 들면, 다음 행보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행마(行馬)’라는 단어도 바둑 용어다. 

이렇듯 최근 언론에선 바둑 용어가 종종 등장하고 있다. 바둑 용어는 함축적이면서 동시에 직관적이다. 짧은 메시지로 촌철살인처럼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이고 싶은 정치인이나 언론인 등이 애용하면서 미디어 노출 빈도도 시나브로 높아지고 있다.

쿠키뉴스에서 언론에서 자주 등장하는 바둑 용어를 정리해봤다.

전공의 사직 국면에 등장한 ‘대마불사’는 바둑 용어
신진서가 ‘6연승 우승’ 위업을 달성한 농심배 최종국에서 ‘착수(着手)’하고 있다. 한국기원

바둑은 검은 돌(흑)과 흰 돌(백)이 겨루는 보드 게임으로, 흑이 먼저 바둑판에 돌을 놓는다. 돌을 놓는 행위를 바둑 용어로 ‘착수(着手)’라고 하는데, 이 ‘수(手)’라는 단어야 말로 바둑 용어의 꽃이라 할 만하다. 

먼저, 착수한다는 용어는 바둑에서 돌을 놓는 것처럼 어떤 일을 시작한다는 의미로 언론 노출 빈도가 높다. 최근에는 ‘내달부터 GTX 시대 열린다…'수서~동탄' 구간 시운전 착수(한국경제)’, ‘[단독] 금감원, ‘분식회계’ 카카오모빌리티 제재 착수(한겨레)’ 등과 같이 사용된 바 있다. 

수(手)가 들어간 용어를 조금 더 살펴보면, ‘수순(手順)’, ‘무리수(無理手)’, ‘승부수(勝負手)’, ‘강수(強手)’ 등이 모두 바둑 용어다. 모두 예시를 들 필요가 없을 정도로 언론에 하루가 멀다하고 등장하는 단어들인데, 최근 사례로 ‘이재명 “의대 정원 2000명 증원? 무리수”···이준석 “약속대련 의구심”(경향신문)’, ‘효성, '투 지주사' 체제 시동계열분리 수순(파이낸셜뉴스)’, ‘1나노 초강수’ 인텔, 올해 삼성과 파운드리 2위 싸움 벌일 판(문화일보), ‘의대 정원’ 이슈에 尹 지지율 상승세…‘승부수’ 통했나(이투데이) 등이 있다. 이 밖에 ‘고수(高手)’, ‘맞수(手)’ 등도 바둑 용어다.

언론뿐만 아니라 바둑을 잘 모르는 일반인들도 자주 사용하는 용어로는 ‘복기(復棋)’가 있다. 한자어 뜻 풀이를 해보면, ‘회복할 복’과 ‘바둑 기’의 만남이다. 수(手)나 마(馬)와 같은 바둑의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그야말로 바둑 그 자체를 담고 있는 용어가 바로 복기인 셈이다.

이와 관련한 최근 언론 보도로는 ‘“아쉬웠죠” 지난해 복기한 키움 김재웅…‘욕심’ 버린다(뉴시스)’, ‘아시안컵 복기하겠다던 클린스만, 이틀 만에 미국행.전력강화위원회 참석 미정(MHN스포츠)’ 등이 있다. 

바둑 용어에서 비롯됐으나 다소 변질된 용어로는 ‘갈라치기’가 있는데, 표준국어대사전에선 갈라치기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바둑에서, 상대편의 돌이 두 귀에 있는 경우 변(邊)의 중앙 부분에 돌을 놓아 아래위 또는 좌우의 벌림을 꾀하는 일.’

용어가 다소 어렵기 때문에 간단하게 다시 풀면, 상대방의 돌이 양쪽(위 아래)으로 포진해 있는 상황에서 그 가운데로 들어가 안정을 꾀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최근에는 양쪽 사이로 갈라치기 해서 뭔가를 도모한다는 뜻이 아니라, 단순하게 양 집단을 나누고 이간질 하는 상황에서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젠더 갈라치기’, ‘세대 갈라치기’ 같은 표현들이 대표적이다. 최근 사례로는 이재명 “하위 평가자 두고 친명 비명 나누는 것은 갈라치기”(주간조선), “젠더 갈라치기⋅백래시 국정 기조 속 ‘성평등 사업’ 더욱 필요”(여성신문) 등이 있다.

전공의 사직 국면에 등장한 ‘대마불사’는 바둑 용어
바둑은 어린 아이부터 연령대가 높은 사람들까지 모두 즐길 수 있는 게임이다. 사진은 ‘바둑황제’ 조훈현 9단(왼쪽⋅71세)이 1995년 당시 세계 바둑 최강자로 군림했던 중국 바둑 레전드 마샤오춘 9단(60세)과 지난 22일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백산수배 대국이 끝난 후 복기(復棋)하는 모습. 한국기원

화투 용어라고 많은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바둑 용어로 ‘꽃놀이패’도 있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법무부 장관 시절에 사용해 화제가 됐던 단어이기도 한데, 표준국어대사전에선 ‘바둑에서 한편은 패가 나면 큰 손실을 입으나 상대편은 패가 나도 별 상관이 없는 패’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 또한 개념 이해가 어렵다. 최대한 쉽게 풀어보면, 바둑은 ‘동형반복(같은 형태가 계속 반복돼 바둑을 끝마칠 수 없게 되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 ‘패’라는 규칙을 만들었다. 동일한 형태를 반복하기 전에 반드시 다른 곳에 ‘팻감’을 사용해야 한다는 규칙인데, 한 쪽이 팻감을 사용하면 다른 쪽은 패의 크기와 팻감을 당한 쪽 손실을 비교하면서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이때, 패의 가치가 한 쪽은 치명적인데 다른 쪽은 큰 부담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그것이 바로 꽃놀이 패다. 꽃놀이패를 쥐고 있는 쪽은 패싸움 손실은 적으면서 원하는 곳에서 이득을 얻을 수 있다. 예컨대 스포티비뉴스에선 ‘“김하성 트레이드, 상당한 관심… 가격은 비쌀 것” 샌디에이고 꽃놀이패 쥐었네’라는 기사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샌디에이고도 김하성은 사실상 꽃놀이패다. 트레이드 조건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냥 쓰면 된다. 김하성의 연 평균 금액은 700만 달러다. 최근 시세와 김하성의 활약상을 생각하면 저렴하다. 팀 재정에 당장 부담을 줄 만한 수준도 아니다. 트레이드 조건이 마음에 들면 트레이드를 하면 된다.’

바둑은 바둑판에 바둑돌을 놓는 게임이므로, 돌 석(石)을 활용한 용어도 발달했다. 대표적으로 ‘정석(定石)’이 있다. 평소 바둑을 즐기던 ‘수학의 정석’ 저자 홍성대 이사장은 언론 인터뷰에서 책 이름에 대한 비화를 다음과 같이 소개한 바 있다. “모 교수와 바둑을 두다 갑자기 바둑돌이 눈에 들어왔다. ‘교수님, 정석이라고 지으면 어떨까요’ 했더니 ‘그것 좋군’ 하셨다.(홍성대⋅동아일보 인터뷰 기사 발췌)

정석이라는 단어가 언론이나 일상 생활에서 등장하는 빈도에 대해선 굳이 설명하는 것이 지면 낭비지만, 가장 최근에 나온 뉴스들을 예로 든다면 ‘노윤서 봄 여친룩 정석, 데님부터 캐주얼까지 패션 완전 정복(뉴스엔)’, ‘[포토] 티모시 샬라메, K하트의 정석(일간스포츠)’, ’허니제이 “육아 시스템 완벽 분업화”…‘MZ세대 부부’ 정석’(뉴시스) 등이 있다.

이 밖에 앞선 착수(着手)에서 비롯된 ‘붙을 착(着)’이라는 한자어가 패할 패(敗)와 만나 형성된 ‘패착(敗着)’이라는 단어도 바둑 용어다. “총선 앞두고 패착” 민주당 수영 전략공천설에 지지자 반발(부산일보) 등과 같이 사용되고, 이 역시 주로 정치인과 언론에서 즐겨 사용한다.

마지막으로 시작은 바둑 용어였지만 현재는 다른 의미로 더 많이 사용되는 단어가 있으니, 바로 ‘호구(虎口)’다. 호구는 한자 그대로 호랑이 입, 즉 범의 아가리라는 뜻이다. 바둑에선 호구 형태를 좋은 모양으로 분류한다. 범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형상이므로, 호구에 들어온 돌은 ‘단수’가 되면서 즉각 잡아먹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호구는 현실에선 ‘어수룩하여 이용하기 좋은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표준국어대사전)’로 사용되고 있다. 호구와 고객을 합쳐 ‘호갱’이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한 바 있다.

이영재 기자 youngjae@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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