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발진 진행중④] 정부는 산업계 파장 걱정 뿐…“억울한 죽음, 책임 있다”

정부, 급발진 인정에 유보적인 입장…산업계 파장 우려
피해자들 “산업계 파장이 국민들 목숨보다 중요한가”
공정위 “급발진 사고 위험성 인지, 입증 어려운게 현실”
“제조사 스스로 입증 책임 져야, 정부 대책 마련 절실”

기사승인 2024-05-30 06: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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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쿠키뉴스가 만난 급발진 의심 사고 피해자들의 삶은 고통 그 자체였습니다.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사고의 원인을 밝힐 방법도, 책임을 질 이들도 아직 존재하지 않습니다. 과거와 미래의 급발진 피해자들을 위한 현장의 목소리와 가능한 해결 방안을 담아봤습니다.


[급발진 진행중④] 정부는 산업계 파장 걱정 뿐…“억울한 죽음, 책임 있다”
안덕근(오른쪽 세 번째)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경기도 평택항 기아자동차 전용부두를 방문해 최준영 기아차 대표와 관계자로부터 자동차 수출 현황 및 애로사항을 청취한 후 수출 선박 주요시설과 조타실 등을 둘러보고 현장근무자들을 격려한 바 있다. 산업통상자원부  

급발진 의심 사고에 대한 제조사의 소극적인 태도에 피해자들은 정부의 도움이 절실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정부 역시 제조사처럼 급발진 인정에 대해 유보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 산업계에 불러올 파장이 우려된다는 이유에서다. 전문가들은 산업계의 파장이 개인의 목숨보다 우선될 수 없다고 지적한다.

법률사무소 나루 하종선 변호사는 “급발진 소송 인정 시 산업계 파장이 우려된다는 건 과장”이라고 꼬집었다. 하 변호사는 “지난 2013년 북 아웃 소송은 도요타가 급발진 사고를 인정한 사례”라며 “도요타가 합의한 이후에 집단소송을 포함해 800건의 개별 소송도 합의했다. 이에따라 도요타에 파장이 있었다면 현재 문을 닫았어야 한다. 도요타는 현재 부동의 세계 1위”라고 말했다.

앞서 도요타 자동차는 지난 2007년 오클라호마주에서 일어난 캠리 승용차의 급발진 사건과 관련해 2013년 10월 배심원단이 “피해자들에게 300만달러(31억8000만원)를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리고 ‘징벌적 손해배상금’을 산정하려 하자 곧바로 피해자들과 합의했다. 토요타가 리콜과 소송 합의금, 벌금 등으로 지급한 금액은 총 40억달러(4조7000여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전해진다. 도요타는 급발진 문제 은폐와 관련해 지난 2014년 3월 미국 법무부에 벌금 12억달러(1조2000억원)를 내고 기소유예를 받았으며 2015년까지 1200만대를 리콜했다.

일명 ‘북아웃 소송’이라 불리는 이 재판은 지난 2007년 9월 진 북아웃이 몰던 캠리승용차가 오클라호마주 고속도로 출구에서 급발진하면서 장벽을 충돌해 운전자는 중상, 동승자 1명은 숨진 사건이다. 도요타는 북아웃 소송 후 미국 법원에서 배심원 재판 대신 신속 조정절차를 활용해 800여건의 급발진 소송을 모두 합의했다.

[급발진 진행중④] 정부는 산업계 파장 걱정 뿐…“억울한 죽음, 책임 있다”
지난 2022년 12월 이도현(사망 당시 12세) 군이 숨진 강릉 급발진 의심 사고 재연 시험이 지난달 19일 강릉시 회산로에서 진행됐다. 도현 군의 아버지 이상훈 씨가 재연 시험을 지켜보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정부는 위와 같은 해외 사례를 참고해 국내에서 발생하는 급발진 의심 사고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기보다 업계 파장을 우선적으로 고려하고 있다. 특히 공정거래위원회는 급발진 의심 사고 발생 시 제조사 책임을 확대하는 ‘제조물 책임법 일부 개정안’에 대해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공정위 관계자는 “급발진 사고 위험성에 대해서는 충분히 인지하고 개선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면서도 “급발진 의심 사고 발생 시 자동차 제조사에서 갖고 있는 자체 데이터를 근거로 결함으로 인한 사고가 아니라고 주장하면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며 책임 소재가 불분명해 입증이 쉽지 않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러면서 “실제 사고가 발생하면 현행법상 블랙박스 감정, CCTV 영상분석이 가장 정확하지만, 비용상의 이유로 이 또한 어렵다”며 “피해자가 손해를 볼 수밖에 없는 구조인 만큼 제조사 책임 입증이 필요한 상황임을 인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자동차 안전을 담당하는 주무 부서인 국토교통부도 미온적인 입장을 보였다.

국토부는 강릉 급발진 사고 이후 제동 압력 센서값 기록 제도화, 페달 블랙박스 장착, 가속제압장치(비정상적 고속주행 현상 시 강제로 속도를 낮추는 것) 등 사고 예방 장치를 의무 설치하도록 하는 방안을 추진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뚜렷한 추진 성과는 없는 상태다. 

[급발진 진행중④] 정부는 산업계 파장 걱정 뿐…“억울한 죽음, 책임 있다”
광양항 자동차부두 전경. 여수광양항만공사  

국토부 관계자는 “관련 사항에 대해 유엔 산하 자동차 국제기준 협의체에서 논의하고 있다”라면서도 “글로벌 시장에서 자동차가 중요한 산업인 만큼 기술 기준을 동일하게 마련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어떤 기준을 신설할 경우 현재 운행되고 있는 차에 대해서는 적용이 어려운 부분이 있다”며 “어떤 기준이 바뀐다는 것은 자동차의 설계부터 생산 라인을 바꾸는 것으로 여러 사항을 고려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정부의 우려에 대해 피해자들은 산업계가 국민의 목숨보다 중요한 것이냐고 토로했다. 

기아 EV6 급발진 의심 사고 피해자 홍배수(가명)씨는 “서민이 무슨 힘이 있나. 법을 알아야 뭘 어떻게 하지. 나처럼 소송할 능력이 안 되면 그냥 이렇게 감당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또 BMW 523d 사고 피해자 송선원씨는 “모두가 한 편이라는 생각밖에 안 든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말만 늘어놓는데 그 말이 맞다고 하는 사람들 뿐이다”라고 했다. KGM 티볼리 에어 사고 유가족 이상훈씨는 “옳은 것이 강한 것을 이기는 일이 일어나길 간절히 바란다. 지금 이 순간에도 급발진의 위험에서 안전한 사람은 없다”고 꼬집었다.

이에 대해 더불어민주당 허영 의원은 “공정위와 정부는 국민을 대변하는 기관이지 제조사 입장을 대변하는 기관이 아니다”라면서 “모든 기록 장치와 부품에 대한 전문성을 가지고 있는 유일한 주체는 제조사다. 제조사 스스로 결함이 없음을 입증해야 한다. 공정거래위원회와 정부가 나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자동차 급발진 연구회 관계자는 “자동차는 소프트웨어 알고리즘으로 움직이는 종합적인 융합 제품”이라며 “사고 발생 시 흔적이 남지 않아 재현이 불가능하다. 이러한 구조를 정부와 제조사가 알고 있는 만큼 소비자가 억울하게 죽지 않도록 공동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하이브리드, 전기차, 내연기관차 구분 없이 급발진이 발생하고 있다”며 “구조를 아는 국내·외 제조사들이 입을 다물고 있어 의심 사고가 계속 발생해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급발진 사고 발생 시 대처법을 알고 있는 것만이 살 길”이라고 꼬집었다.

조은비 기자 silver_b@kukinews.com

영상=장경호, 정혜미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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