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머리가 길면 교권이 추락하나요?”… ‘학생인권조례 폐지’ 갈등 점화

기사승인 2024-05-09 06: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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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머리가 길면 교권이 추락하나요?”… ‘학생인권조례 폐지’ 갈등 점화
제323회 서울특별시의회 임시회 3차 본회의가 열린 지난달 26일 서울시의회 앞에서 학생인권조례 폐지에 대한 반대 집회가 열리고 있다. 연합뉴스

교권 추락의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됐던 학생인권조례가 충남과 서울에서 폐지된 데 이어 광주에서도 폐지 위기에 부딪혔다. 지난해 서울 서이초 교사 사망 이후 학생인권조례가 교권 추락을 가속한다는 의견과 교권과는 별개의 문제라는 의견이 맞서며 정쟁으로 번지는 양상이다. 이러한 논란을 지켜보는 학생들은 학교의 각 주체 권리 중 우선하는 것이 없으며, 학생의 기본권을 보호할 수 있는 최소한의 방어막이 필요하다고 호소한다.

8일 쿠키뉴스와 만난 고등학생 정모(16)양은 학생인권조례 폐지에 대해 ‘고래 싸움에 새우 등이 터진 격’이라고 정의한다. 정 양은 “여러 법적, 사회적 문제로 선생님들의 교권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며 “다만 학생들의 개성을 표현할 권리, 사생활을 보호받을 권리 등을 명시한 학생 인권 때문에 교권이 추락한 건 아니지 않느냐”고 말했다. ‘인권 대 교권’ ‘학생 대 교사’ 등의 이분법으로 나뉘는 어른들의 사고방식을 이해하기 힘들다고 덧붙였다.

중학생 김모(15)양도 “학생 인권, 교권 등 학생과 교사의 권리 보호를 위해 한쪽의 희생을 담보하면 안 된다”며 “갑자기 용의 복장 검사나 불필요한 상황에서의 책가방 검사 등과 같이 동의하지 않은 일이 발생한다면 굉장히 불쾌할 것 같다”고 말했다. 학생들은 학생인권조례를 폐지한다면 이를 보완할 수 있는 인권 보호법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학생인권조례는 교권 추락의 원인으로 지목되기도 하지만, 학생이라는 이유로 침해됐던 기본권을 보호했다는 평가도 받기 때문이다. 고등학생 김모양(17)은 “학생인권조례가 폐지된다면 학생들을 위한 다른 보호법이 학교 내부 (규칙)에서라도 생길 것이라 본다”고 말했다.

현장 교사들의 반발도 나온다. 수도권 한 중학교 교사 김모(30)씨는 “학생인권과 교사인권은 파이를 가지고 나누는 문제가 아니다”라며 “교육현장에서는 그렇게 인식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학교 밖 사람들이 결정한 것”이라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유엔아동권리협약 등 국제적으로 최소한의 인권 규범을 명시하고 있다. 인권조례 폐지는 선진국에서 할 일은 아니다”라며 “내용이 부족했으면 폐지가 아니라 개정으로 갔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학생인권조례는 2010년대 초반 학생 인권 보호를 제도화해야 한다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 만들어졌다. 경기도에서 지난 2010년 10월5일 전국 최초로 학생인권조례를 공포했으며 광주 서울 전북 충남 인천 제주 등 7곳에서 시행됐다. 사생활 자유, 휴식권 보장, 성적 지향과 종교 등을 이유로 차별받지 않을 권리 등이 골자다. 기초학력 저하, 성생활, 동성애를 부추긴다는 주장이 제기되며 폐지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지만, 지난해 7월 서울 서초구 서이초 교사 사망 이후 교권 추락의 주요 원인으로 꼽히면서 폐지 움직임에 본격적인 불이 붙었다.

학생인권조례가 교권 침해의 원인이 됐다는 인과관계가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만큼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지난해 12월 국가인권위원회가 발간한 ‘학생인권조례, 오해 넘어 이해로’ 보고서에 따르면 학생인권조례가 시행 중인 지역의 100명당 교육활동 침해 건수는 2021년 기준 0.51건이다. 비조례지역은 0.54건으로 오히려 조례 시행지역보다 오히려 많다.

학생인권조례 폐지로 학생 인권 보호 시스템이 사라지게 될 것이란 우려가 크다.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은 서울시의회의 조례 폐지안 의결 직후 시교육청 앞에서 천막 농성을 벌이고 재의를 요구하겠다고 밝혔지만, 시의회 의석 3분의 2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국민의힘 시의원이 뭉치면 재의결할 수 있다.

예컨대 서울 학생인권조례는 학생이 인권을 침해당했거나 당할 위험이 있는 경우 누구든지 학생인권옹호관에게 구제를 신청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사건을 조사하는 학생인권옹호관은 인권침해 여부를 판단해 가해자·관계인·교육감에게 인권침해 행위 즉시 중지, 학생인권 회복 등 필요한 구제조치 등을 권고할 수 있다. 

서울시교육청은 지난 7일 장혜영 정의당 의원 요구로 국회에 제출한 자료를 통해 “학생 인권 침해에 대한 권리구제 청구를 할 수 있는 근거가 사라지고, 인권침해 사안에 대한 조치에 대한 어려움이 발생할 수 있다”고 했다. 서울시보다 먼저 학생인권조례가 폐지된 충남도교육청 역시 같은 자료에서 ‘학생인권 구제활동의 축소와 권고 권한 상실’ ‘조례에 근거해 진행된 학교생활규정의 인권친화적 개정 위축’ 등의 우려를 담았다.

국가인권위원회도 충남도의회와 서울시의회의 학생인권조례 폐지 의결에 유감을 표했다. 송두한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은 어린이날인 지난 5일 “지난 5년간 인권위에서 다룬 학교 내 인권침해 진정 사건에는 두발·용모·복장 제한이 가장 많았고, 폭언 등 인격권 침해 사건이 그다음이었다”며 “이는 아동을 권리의 주체가 아니라 미성숙한 존재나 훈계의 대상으로 보는 인식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송 위원장은 “아동 인권을 학교에서 구현하려는 노력 중 하나가 학생인권조례”라며 “지금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학생이 독립된 인격체로 존중받고 교사의 교육활동이 보장될 수 있는 학교를 어떻게 운영할지 지혜를 모으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유민지 기자 mj@kukinews.com 기사모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