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외팔목’…존폐 기로 선 바둑리그에 ‘훈수’ [데스크칼럼]

기사승인 2024-05-21 06: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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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7일 바둑 세계 최강자 신진서 9단이 유튜브 ‘슈카월드 코믹스’에 출연했다. 신 9단은 문자 그대로 코믹한 모자를 쓰고 시종 유머와 개그를 주고받으며 접바둑을 뒀다. 

‘반외팔목’…존폐 기로 선 바둑리그에 ‘훈수’ [데스크칼럼]
쿠키뉴스와 인터뷰에서 신 9단은 ‘바둑 보급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얘기한 바 있다. 코믹 유튜브 출연은 신 9단의 강력한 의지를 가장 잘 표현한 사례다. 21일 현재 해당 영상은 조회수 36만회를 돌파하며 인기를 끌고 있다.

판을 깔아주기만 하면 프로 바둑 선수들도 팬들과 함께 어울리며 잘 놀 수 있다. 그러나 바둑계에선 좀체 만남의 장이 열리지 않고 있다. 심지어 팬이 없다면 존재할 수 없는 ‘바둑리그’에서도 팬들과 함께 하려는 노력이 거의 없는 실정이다.

지난해 12월28일 개막해 장장 5개월간 달려왔던 바둑리그가 창단 2년차 신생 구단 ‘울산 고려아연’을 새로운 챔피언으로 배출하면서 막을 내렸다. 정규시즌을 2위로 마친 울산은 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한국물가정보에 패하면서 탈락 위기를 맞았지만, 이내 전열을 재정비하고 2-3차전을 연거푸 승리, 챔피언결정전으로 올라섰다.

많은 이들이 정규시즌 1위 원익의 우승을 점친 챔프전에서도 울산은 2-1 승리를 일궈내면서 2023-2024 시즌 KB국민은행 바둑리그 왕좌에 등극했다. 그러나 울산의 우승이 확정되던 그 순간, 어디에도 ‘팬’의 존재는 없었다. 현장에서 우승의 감동을 함께한 바둑 팬이 전무했을 뿐만 아니라, 생방송에서도 챔피언결정전 최종 3차전 시청률은 바닥을 쳤다. 이번 시즌 바둑리그 평균 시청률은 0.102%다. 양 팀 1-1 상황에서 어느 쪽이 이기든 무조건 우승 팀이 가려지는 챔프전 3차전 시청률은 0.084%였다. 우승 결정전 시청률이 리그 평균을 밑돌았다는 사실은 팬들의 외면을 받았다는 점을 방증한다.

어느덧 20년의 역사를 쌓은 바둑리그는 지난 2003년 ‘드림리그’로 출범한 이후 특별한 행사가 없는 한 바둑 팬들의 ‘직관’을 허용하지 않았다. 이번 시즌에는 지난해 첫 선을 보였던 ‘바둑리그 서포터즈’들이 현장에 4회 방문한 것이 전부였다. 바둑리그 서포터즈는 대학생⋅대학원생 등으로 구성된 일종의 바둑리그 응원단이다.

바둑 팬들이 누구나 현장에 찾아와 좋아하는 팀을 응원하고 선수들과 만날 수 있도록 하기에는 ‘공간적인 제약이 있다’는 것이 바둑리그를 주최하고 있는 한국기원이 밝힌 표면적인 이유다. 하지만 한국기원이 여타 대회에서 종종 시도했던 ‘현장 해설’ 등 팬과 소통하는 행사도 유독 바둑리그 공식 경기에선 찾아보기 어려웠다.

대국 현장인 지하 1층 바둑TV 스튜디오의 협소함을 탓하기 보다 넓고 쾌적한 2층 예선대국실에서 공개 해설을 진행했으면 어땠을까. 경기 종료 후 선수들이 2층으로 올라와 대국 소감을 나누고, 팬들과 만나는 시간을 가졌다면 더욱 뜻깊은 한 시즌의 마무리가 되었을 것이다. 이미 몇 번의 행사를 통해 팬들의 만족도가 검증되기도 했던 방식이다.

이런 가운데 바둑 팬들은 서서히 ‘조용한 보이콧’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지난 2017년 시청률 조사기관 닐슨의 자료에 따르면, 바둑리그 시청률은 유료 방송 가구 기준으로 0.274%에 달했다. 이번 시즌 평균 시청률(0.102%)과 비교해보면 새삼 그 차이가 크게 다가온다. 

바둑계는 스포츠로서의 바둑이 과거와는 달리 ‘비인기 종목’으로 전락했다는 비판에 ‘온라인 바둑사이트, 유튜브 등 여러 경로로 바둑 팬이 여전히 바둑을 즐기고 있다’는 식으로 항변해왔다. 하지만, 대부분 한국기원 소속 바둑 프로기사로 구성된 ‘인기 바둑 유튜버’들은 어느 한 사람도 바둑리그 챔피언결정전을 생중계하지 않았다. ‘돈’으로 움직이는 ‘프로’들은 바둑리그가 시청률이 나오지 않고, 따라서 돈이 되지 않는다는 철저한 자본의 논리로 움직였다.

‘반외팔목’…존폐 기로 선 바둑리그에 ‘훈수’ [데스크칼럼]
창단 2년차 울산 고려아연이 깜짝 우승컵을 들어올린 이날, 경기장에 찾아온 팬은 없었다. 챔피언결정전 최종 3차전 시청률(0.084%)이 이번 시즌 평균 시청률(0.102%)에도 미치지 못하는 참담한 사태도 벌어졌다. 한국기원

옆 동네로 시선을 돌리면 사뭇 다른 광경이 펼쳐진다. 먼저 국내 e스포츠의 ‘제왕’이라 할 수 있는 ‘리그 오브 레전드 챔피언스 코리아(LCK)’는 팬이 없이는 절대 성립할 수 없는 리그다. 올해 1월로 시계를 돌려보면, 당시 스포츠 분야에서 가장 화제가 됐던 사건은 단연 ‘LCK 팬미팅 중단 사태’였다. 

LCK는 지난 1월 SNS 공지를 통해 “안타깝게도 경기 종료 후 롤파크에서 진행되던 대면 팬 미팅을 2024 시즌부터 잠정 중단한다”며 “선수들과 팬들이 서로 안전하고 쾌적하게 팬 미팅을 할 수 있을 만큼 넓은 공간이 부재한 것이 가장 큰 이유”라고 밝혔다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뭇매를 맞았다.

선수들은 속속 인터넷 방송을 통해 불만을 표출했다. 한화생명e스포츠 ‘바이퍼’ 박도현은 “남는 게 자리”라고 LCK를 직격했고, DRX ‘세텝’ 송경진도 “(팬들에게) 뭔가 더 해드려야 할 것 같은데 경기만 보고 집에 간다니 쉽지 않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징동 소속 ‘룰러’ 박지혁은 개인 방송을 통해 “이제 현장에 누가 가냐”고 비판하면서 “아무도 표를 안 사봐야 이게 잘못됐다는 것을 알지 않을까”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지난해보다 가격이 오른 LCK 입장권 가격은 주중 2만원, 주말 2만5000원이다. ‘Cho’라는 네티즌은 “팬이 없으면 리그는 그냥 오락실”이라며 “축구도 팬이 없으면 동네 공놀이인데, 인기로 먹고살고 인기로 돈 버는 집단이 팬을 내치려고 하면 장사 안하겠단 소리”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기존 팬 미팅을 진행했던 장소에 티켓 부스 발권소와 MD 상품 판매소를 설치했던 LCK 측은 얼마 못 가 백기 투항했다. 사과문을 게재하고 다시 원래 장소에서 팬들과 선수들이 만날 수 있도록 ‘원상 복구’하면서 사태는 해프닝으로 일단락됐다. 

‘반외팔목’…존폐 기로 선 바둑리그에 ‘훈수’ [데스크칼럼]
취소됐던 팬미팅이 재개됐던 지난 1월24일, 서울 종로 롤파크에서 몰려든 팬들에게 한화생명e스포츠 선수단이 사인을 하고 있다. 쿠키뉴스 자료사진

최근 무서운 기세로 치고 올라와 이미 모든 면에서 바둑을 넘어섰다는 평가를 받는 프로당구협회(PBA) 주최 리그와 챔피언십 등 대회들도 팬을 최우선으로 중시하는 마음은 매한가지다. 경기도 고양시에 위치한 킨텍스에 PBA 스타디움이 들어선 이후 현장을 찾는 팬들이 시나브로 증가하는 추세다.

지난 2월24일 LPBA 챔피언십 8강 경기에선 ‘역스윕’ 대역전승 후에 경기장을 나서려던 김민아 선수에게 직접 준비해온 선물을 건네는 당구 팬의 모습이 쿠키뉴스 카메라에 포착되기도 했다. 팬의 응원에 힘을 얻은 김민아는 기세를 몰아 결승에 진출, 스롱을 4-1로 완파하고 ‘통산 3승’과 ‘랭킹 1위’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기도 했다. 경기장에 직관을 오는 관객이 늘어나고 있는 PBA 무대는 생방송 시청률, 유튜브 조회수에서도 괄목할 만한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여타 종목과 너무나 차이가 나는 이런 모습에 바둑리그 타이틀 스폰서인 KB국민은행은 다음 시즌 후원 여부를 놓고 ‘장고’에 들어갔다. 챔피언결정전 최종 3차전이 치러지는 현장에 바둑 팬이 찾아오지 않는 스포츠, 생방송 시청률이 2.7배 수직 하락한 종목이 ‘밑 빠진 독’이 아닐지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기원과 바둑계는 e스포츠 레전드 ‘페이커’ 이상혁 선수의 이야기를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페이커는 “스포츠가 존재하는 이유는 팬들의 관심과 애정 때문”이라고 강조하며 “팬 분들에게 더 많이 보답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최우선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영재 문화스포츠부장 youngjae@kukinews.com 기사모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