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까지 벗은 가운…“휴진 소식에 잠을 못 잤어요”

기사승인 2024-06-18 06:0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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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까지 벗은 가운…“휴진 소식에 잠을 못 잤어요”
17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에서 환자와 보호자들이 진료를 기다리고 있다. 사진=곽경근 대기자

“교수들 병원 안에 있을 거면서 왜 진료는 보지 않는 건가요. 아픈 몸 이끌고 온 환자들한테 너무한 처사 아닌가요?” (김병민·서울 종로구·54)

“서울대병원은 국민 세금 걷어 국가가 지원하는 공공병원이잖아요. 공공병원 의사까지 국가 의료 정책이 싫다고 진료 떼려치우면 환자들은 뭘 믿고 의사에게 건강을 맡기죠?” (박상현·서울 중구·63)

서울대병원 전공의에 이어 교수들까지 가운을 벗었다. 환자들은 손꼽아 기다린 진료가 기약 없이 밀릴까봐 마음을 졸였다. 나아가 휴진을 정당화할 수 없다며 철회를 촉구했다. 교수들은 전공의에 대한 행정처분 취소 등 정부에 요구한 사안이 받아들여질 때까지 휴진을 멈추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서울대병원, 분당서울대병원, 서울특별시보라매병원, 서울대병원강남센터 등 4개 서울대병원 교수 절반가량이 17일부터 무기한 휴진에 들어갔다. 휴진 참여자는 전체 교수의 54.7%에 달하는 529명이다. 전공의 이탈 이후 62.7%였던 수술장 가동률은 33.5%로 떨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이날 오후 기자가 찾은 서울대병원은 이미 많은 환자의 진료·수술 일정이 연기돼 평소보다 한가했다. 진료 예약 변경·취소에 대해 항의하거나 진료가 지연된다며 불만을 드러내는 환자는 보이지 않았다. 일부 진료과 교수들이 개별적으로 휴진에 나섰고, 상당수는 정상 진료를 이어간 것으로 전해졌다. 우려했던 혼란은 크지 않았지만 병원에서 만난 환자들은 사태의 장기화를 걱정했다.

위암으로 항암치료를 받고 있는 정호영(가명·52)씨는 “휴진 소식에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예약된 진료가 취소되는 것은 아닌지 마음 졸이며 병원에 왔는데 다행히 평소대로 치료받을 수 있었다”면서 “이런 상황이 계속 된다면 앞으론 어떻게 될지 모를 일이다. 병원을 옮기는 게 나을지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 갑상선암 진단을 받은 강주희(가명·60)씨는 의사들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강씨는 “불편하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오죽했으면 교수님들까지 휴진에 나서겠는가”라며 “담당 주치의가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그 말만 굳게 믿고 있다”고 전했다. 유지연(가명·46)씨는 정부와 의사들에 대한 반감을 표출했다. 내분비질환 때문에 병원을 찾은 유씨는 “무기한 휴진이면 이 사태가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것 아닌가. 진료 못 받아서 병세 악화돼 죽으면 그 책임은 누구한테 물어야 하나”라며 “정부와 의사 싸움에 등 터지는 건 환자들이다. 언제까지 우리가 피해를 감내해야 하는 것이냐”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교수까지 벗은 가운…“휴진 소식에 잠을 못 잤어요”
17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수술실 안으로 환자와 보호자, 의료진이 들어가고 있다. 사진=곽경근 대기자

환자단체들은 규탄의 목소리를 냈다. 한국백혈병환우회 등이 모인 한국환자단체연합회는 이날 입장문을 내고 “정부를 압박하는 도구가 환자의 불안과 피해라면 그 어떤 이유도, 명분도 정당화될 수 없다”고 비판했다. 이들은 “전공의 9000여명이 4개월 이상 의료현장을 이탈한 상황에서 의대 교수마저 무기한 전체 휴진에 돌입하면 의료공백으로 인한 환자 불안과 피해는 더욱 커질 것”이라며 “응급실을 정상 운영하더라도 배후 진료과 인력이 부족하면 심각한 환자 안전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지적했다.

오는 18일 여의도에서 전국의사 총궐기대회를 여는 대한의사협회(의협)를 향해선 사회적 책무가 실종됐다고 짚었다. 연합회는 의협이 지난 16일 집단 휴진 철회 요건으로 ‘의대 증원 재논의’ 등을 정부에 제시한 것에 대해 “지난 넉 달간의 의료공백 기간 동안 어떻게든 버티며 적응해왔던 환자들의 치료와 안전에 대한 고려가 일절 없음을 여실히 보여줬다”고 꼬집었다.

집단 휴진을 우려하는 목소리는 의료계 내부에서도 잇따랐다. 의사단체인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는 성명을 내고 “일부 의대 교수들이 정부와 전공의 간 중재자 역할을 포기하고 의사 증원 반대 투쟁에 앞장서는 현 상황에 반대한다”며 “의대 교수들의 진료 중단은 벼랑 끝에 놓인 환자들의 등을 떠미는 행위다”라고 일갈했다.

홍승봉 거점 뇌전증지원병원 협의체 위원장은 쿠키뉴스를 비롯한 주요 언론에 기고문을 보내 환자 생명을 볼모로 한 집단행동은 어떤 이유로도 용납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서울의대를 졸업한 홍 위원장은 국내 뇌전증 분야 최고 명의로 꼽힌다. 그는 “10년 후 의사 1509명이 더 나온다면 그때 전체 의사 15만명의 1%에 해당한다. 1% 의사가 늘어난다고 해서 한국 의료가 망한다고 말할 수 있나”라며 “의사가 부족해 환자가 죽는 것이지 의사가 많아서 환자가 죽는 나라는 세계 어디에도 없다”고 했다. 의대생 학부모들에겐 “내 아들, 딸이 의대생, 전공의라면 빨리 복귀하라고 설득할 것”이라며 “자녀가 훌륭한 의사가 되길 바라신다면 어떤 충고를 하셔야 할지 고민해 주시길 진심으로 부탁드린다”고 전했다.

서울대병원 교수들은 다른 병·의원에서 진료가 가능하거나 진료를 미뤄도 당분간 큰 영향을 받지 않는 환자의 정규 외래 진료와 수술을 중단하는 것이며, 진료가 꼭 필요한 중증·희귀질환자 진료와 응급실, 중환자실 운영 등은 계속 한다고 했다. 강희경 서울의대·서울대병원 교수협의회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은 “진료가 조정되지 않은 분이 계실 텐데 걱정하지 말고 병원에 오셨으면 좋겠다. 약 필요한 분도 진료받길 바란다”면서 “중환자실, 응급실은 열려있다. 우리의 진의는 환자들을 다치게 하고 힘들게 하려는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비상대책위원회는 △전공의에 대한 행정처분 취소 △현장 의견 반영이 가능한 상설 의정협의체 구성 △2025년도 의과대학 입학 정원 재조정 등을 휴진 철회 조건으로 내세웠다.

신대현 기자 sdh3698@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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