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산율 제고=저출산 해결' 틀 깬다…‘성‧재생산권’ 뭐 길래

강압 없이 자녀 가질 여부 결정해야…전 생애 건강 보장도 중요

기사승인 2021-12-17 06:30:08
- + 인쇄
'출산율 제고=저출산 해결' 틀 깬다…‘성‧재생산권’ 뭐 길래

한국의 저출산 대책에 ‘생애 전반 성‧재생산 건강 및 권리 보장’이 포함됐다. 이름도 생소한 ‘성‧재생산권’은 저출산 문제 해결과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일까?

우선 ‘성‧재생산권’(Sexual and reproductive health and rights)이 무엇인지 알 필요가 있다. 성‧재생산권은 개인이 어떠한 강압이나 차별, 폭력 없이 성적 관계를 형성하고 자녀를 가질 여부와 시기‧방법‧자녀의 수 등도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또 생식기관의 기능 및 발달에 있어 질병, 기능저하 또는 장애로 인해 고통이 없는 상태를 포함해 신체적‧정서적‧사회적으로 건강할 수 있도록 필요한 정보나 의료서비스 등을 제공 받을 권리를 포괄한다. 국제사회에서는 이미 40년 전부터 성‧재생산 건강 및 권리를 인권으로 정립할 것을 논의해 왔으며 1994년 유엔 국제인구개발회의(ICPD)에서 재생산 권리를 건강영역으로 확장하면서 인권으로 인정했다. 

얼핏 보면 성교육, 피임, 임신유지 및 종결(낙태) 등을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도록 보장한다는 점에서 저출산 극복과 거리가 멀다고 느껴질 수 있지만 오히려 성 지식 부족과 정확하지 않은 피임 실천은 원치 않은 임신 및 안전하지 못한 인공임신중절의 가능성을 높인다. 이는 향후 건강한 임신‧출산까지 저해할 수 있다. 

일각에서는 낙태죄를 더 강하게 처벌해야 출산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 그러나 미국의 사례를 보면, 1973년 낙태 합법화 당시 16.3%이던 낙태율이 1980년 29.3%까지 높아졌으나 오히려 보건의료 체계, 성교육, 피임지원 등 국가의 정책적 노력에 의해 점차적으로 낮아져 2014년 14.6%로 떨어졌다. 즉, 중요한 것은 처벌이 아니라 여성의 임신중지에 대한 자기결정권 및 건강보장을 위해 국가가 어떠한 제도적 지원을 마련하느냐다. 

특히 한국사회는 불평등한 성역할(젠더) 규범이 만연함에 따라 원치 않은 성적 경험, 젠더 폭력 등이 증가하면서 성‧재생산 권리가 침해돼 왔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조사를 보면, 원치 않은 성관계 경험은 여성(62.3%)이 남성(33.6%)보다 2배 많고, 청와대 국민청원 젠더이슈(20만명 이상 동의) 중 여성폭력은 63%를 차지하고 있다. 
불평등한 젠더 규범은 지금까지 한국의 저출산 대책에도 반영됐다. 

A씨의 사례를 보자. A씨 살고 있는 국가는 성‧재생산권과 건강에 대한 교육이 부족하다. 젠더폭력이 증가하고 있고 피임 방법은 남성 중심으로 결정되는 경향이 크다. 만혼, 비혼, 생식 건강의 악화 등 다양한 사회‧환경적 변화로 인해 저출산 현상이 심각해지자 정부는 ‘출산율 제고’를 목표로 산모와 영유아에만 초점을 맞춰 지원하기 시작했다. 출산 계획이 없는 여성은 월경, 질환 예방, 임신중지 등과 관련한 권리를 법률에서 충분히 보장받지 못한다. 출산 지원을 한다는 명목 하에 지자체별 가임기 여성 수와 평균 출산연령, 합계출산율 등을 지도 위에 표시한 ‘출산 지도’를 만들기도 했다. 

이 사례는 지금까지의 한국사회 모습을 대변한다. 정부가 지난 2005년부터 수립‧이행한 제1~3차 저출산 고령사회 기본계획은 ‘임신‧출산’이라는 특정 시기에 집중해 여성의 몸을 통제하고 출산율을 높이는데 중점을 두었다. 

여성을 임신‧출산을 위한 도구적 관점으로 보는 정책이 지속되는 가운데 저출산 현상은 더욱 심화됐다. 우리나라 합계출산율(한 여자가 가임기간에 낳을 것으로 기대되는 평균 출생아 수)은 2015년 1.24명에서 2020년 0.84명으로 떨어져 경제협력기구(OECD) 국가 중 가장 낮은 수준에 도달했다. 비혼주의/딩크족(정상적인 부부생활을 영위하면서 의도적으로 자녀를 두지 않는 맞벌이부부)에 찬성하는 30대 여성 B씨는 “출산율 낮다, 심각한 상황이다라고 겁줘봐야 애 낳아서 키우며 사는 현실이 더 겁난다. 애 낳는다고 당장 몇 푼 주는 게 큰 유인책으로 느껴지지도 않는다”라면서 “비혼/딩크족도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으니 정부의 겉핥기식 대책에 관심을 잘 안 갖게 되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문제는 사회‧환경적 변화로 비혼 인구가 증가하고 초산 연령이 높아지는 등 저출산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요인도 지속적으로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가임기 중심의 임신, 출산 건강 지원과 같은 협소한 지원으로는 건강의 연속성 측면과 다양한 수요를 반영하지 못한다. 

이에 대통령 직속기관인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이하 저고위)는 지난해 ‘제4차 저출산 고령사회 기본계획안(2021-2025)’을 발표하고 아동‧청소년기부터 보편적이고 포괄적인 ‘생애 전반 성‧재생산 건강 보장’을 공식 정책과제로 채택했다. 남녀 모두의 ‘보편적 건강’ 측면으로 정책 패러다임을 전환한 것이다. 

저고위 측은 “환경호르몬 등 성조숙증, 난임, 정자 수 감소에 영향을 미치는 외부 요인이 증가하고 있다. 또 만혼‧초산 연령 상승, 첫 성경험‧월경 연령의 하향 등으로 건강 보장 수요는 다양화되고 있는 추세”라며 “임산과 출산은 결국 어릴 때부터 생식건강이 유지되고 성과 관련한 자기 결정도 보장돼야 가능한 일이다. 임신‧출산 건강 지원만으로는 건강의 연속성 측면에서 한계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성‧재생산 건강은 여성이라는 특정 인구집단이나 가임기라는 시기의 지원만으로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며 “전 생애에 걸쳐 연결‧누적된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저고위는 성‧재생산 관련 법제의 문제점을 개선하고자 모자보건법 개정, 청소년‧청년기 건강 지원 등 생애 전반 생식건강 관리, 질환 예방, 수요자 중심의 난임 지원, 산모‧신생아 건강 지원 등에 나선다는 방침이다. 

현행 모자보건법에서는 ‘모성’을 임산부와 가임기 여성으로 정의하며 출산 계획이 없는 여성의 월경, 질환 예방 등 성‧재생산 건강과 권리는 충분히 보장하지 않고 있다. 이에 법률을 여성‧영유아 등의 건강을 포괄적으로 보장할 수 있는 방향으로 개정을 추진한다는 계획이다. 

또 모든 국민에게 전 생애 월경, 피임, 생식기질환, 임신의 유지‧종결 등에 관한 상담서비스를 제공하고, 검진‧치료지원도 나선다. 아울러 환경호르몬, 중금속 등 성‧재생산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유해물질 노출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안전한 환경 조성도 추진한다.    

유수인 기자 suin92710@kukinews.com 기사모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