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V 감염인이 범죄자인가요?

후천성면역결핍증예방법 19조·25조 위헌법률심판
‘체액’, ‘전파매개행위’ 모호한 표현 투성이 
HIV 감염, 항레트로바이러스 요법으로 만성질환처럼 관리

기사승인 2022-11-19 06:0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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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V 감염인이 범죄자인가요?
쿠키뉴스 자료사진

후천성면역결핍증예방법 제19조가 인체면역결핍바이러스(HIV) 감염인의 인권을 침해하는 시대착오적 법률이라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HIV는 인체의 면역기능을 파괴하는 바이러스다. 이른바 ‘에이즈(AIDS)’로 불리는 후천성면역결핍증의 원인이 된다. HIV가 인체에 유입됐다고 해서 곧 후천성면역결핍증 환자인 것은 아니다. 바이러스로 인해 인체의 면역 체계가 파괴되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게 되면 비로소 후천성면역결핍증으로 진단된다. 주요 면역세포인 ‘CD4+T 세포’ 수가 200/mm3(입방 밀리미터) 미만이면 환자로 판정한다. 

HIV 감염인은 비감염인과 다를 바 없이 일상을 영위할 수 있다. 매일 항레트로바이러스제를 복용하면 혈중 HIV 양이 미검출 수준으로 떨어진다. 이런 상태에서는 타인에 대한 전파 위험성이 없으며, 감염인도 비감염인과 다를 바 없이 건강을 유지하게 된다. 

우리나라는 체계적인 관리 시스템을 갖추고 있어, HIV 감염도 당뇨와 고혈압 등의 만성질환과 같이 관리 가능한 질환으로 이해되고 있다. 현재 국내에는 30여개의 HIV 치료제가 유통되고 있어, 접근성이 높다. 진료 및 치료 비용은 후천성면역결핍증 예방법에 따라 국가와 지자체가 지원한다. 환자가 의료기관에 비용을 지불하고, 거주지의 보건소에 영수증을 제출하면 금액이 환급된다.

후천성면역결핍증예방법은 30년도 훌쩍 넘긴 낡은 법이다. 지난 1987년 해외 출입국 증가로 인해 HIV의 국내 유입 및 감염 확산의 우려가 커지자 마련됐다. 이 법의 19조는 ‘감염인은 혈액 또는 체액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전파매개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라고 규정한다. 이를 위반하면 같은 법 벌칙조항 25조 제2호에 따라 3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게 된다. 

문제는 ‘전파매개행위’의 의미를 아무도 모른다는 점이다. 전파매개행위와 체액 등 조항에 나열된 어휘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같은 법 및 시행령을 포함해 어디에도 명문으로 규정되지 않았다. HIV 감염인의 행동은 무엇이든 범죄로 간주돼 형사처벌을 받을 수 있게 된다. 모호한 조항으로 인해 처벌의 범위가 무한하게 확장되는 셈이다.

현재 헌법재판소에서는 해당 조항에 대한 위헌법률심판 절차가 진행 중이다. 앞서 2019년 11월 서울서부지법 소속 판사는 후천성면역결핍증 예방법 위반으로 기소된 사건을 심리하던 중, 19조가 위헌의 소지가 있다고 판단해 직권으로 위헌법률 심판을 제청했다. 특정 질병을 가진 환자를 낙인찍고, 기본권을 부당하게 제한하는 부작용이 있다는 것이다.

HIV 감염인이라는 낙인은 환자들의 기본권을 크게 침해하고 있다. 앞서 9월 국가인권위원회는 HIV 감염인 환자의 수술을 거부한 서울 관악구의 한 병원에 대해 차별행위를 시정할 것을 권고했다. 병원 측은 기구와 시설이 충분하지 않다며 수술을 거부했지만, 질병관리청의 HIV 감염인 진료 지침은 모든 환자에게 적용하는 표준주의 지침을 준수할 경우 혈액 매개 병원체를 보유한 환자의 수술을 위해 별도의 장비나 시설이 필요하지 않다고 규정한다.

해외에서도 HIV 감염인을 처벌하는 제도는 후진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유엔 산하 에이즈 전담기구 유엔에이즈계획(UNAIDS)은 HIV 감염인을 특정해 처벌하는 법률은 HIV의 예방, 치료, 관리 및 지원을 저해하는 역효과를 일으킨다고 경고했다. 이런 법률은 HIV 감염인을 비롯한 건강 취약 집단의 인권을 침해할 수 있으므로 폐지할 것을 권고했다.

감염인의 행위를 범죄로 규정해 처벌하는 법률은 국제사회에서 점차 사라지는 추세다. 유엔개발계획(UNDP)의 ‘HIV와 법에 관한 국제위원회’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2012년부터 2018년까지 가나, 그리스, 온두라스, 케냐, 말라위, 몽골, 스위스, 타지키스탄, 베네수엘라, 짐바브웨, 미국의 2개 주에서 HIV를 범죄화하는 법을 폐지했다.

헌번재판소가 후천성면역결핍증예방법의 위헌성을 심판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의료계는 과학적·의학적 근거에 따라 환자의 인권을 보장하는 결론을 도출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이서영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인권위원은 “지속적인 항레트로바이러스 요법으로 바이러스 미검출 상태가 되면, 해당 HIV 감염인의 체액은 전파력을 상실한다”며 “현행법은 HIV 감염이 발생하는 구체적인 조건을 고려하지 않고 감염인의 모든 행위, 모든 체액을 타인을 위협하는 범죄로 간주한다”고 설명했다.

국가가 감염인 개인에게 질병에 대한 책임을 전가해서는 안 된다는 비판도 나왔다. 이 위원은 “법률의 내용이 모호한 것만 문제가 아니라, 이런 법률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문제다”라며 “공권력으로 감염인 개인을 통제하고 처벌하는 것은 감염인이 감염을 숨기고 제대로 치료를 받기 어렵게 만들고, 결국 공중보건에도 전혀 이득이 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한성주 기자 castleowner@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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