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직서 쓰고 나갈까, 노조 설립신고서 쓰고 남을까 [이생안망]

기사승인 2023-01-07 06:0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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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입버릇처럼 ‘이생망’을 외치며 이번 생은 망했다고 자조하는 2030세대. 그러나 사람의 일생을 하루로 환산하면 30세는 고작 오전 8시30분. 점심도 먹기 전에 하루를 망하게 둘 수 없다. 이번 생이 망할 것 같은 순간 꺼내 볼 치트키를 쿠키뉴스 2030 기자들이 모아봤다.

사직서 쓰고 나갈까, 노조 설립신고서 쓰고 남을까 [이생안망]
그래픽=이승렬 디자이너 

일 잘하는 선배가 방긋방긋 웃으며 안부를 물으면 무섭다. 며칠 뒤 사직서를 내고 홀연히 사라지기 때문이다. 매일 야근하며 고생하던 후배는 ‘그동안 여러모로 신경 써주셔서 감사했습니다’로 시작하는 긴 카톡을 남기고 회사를 떠났다. 과중한 업무, 업계 바닥 수준 연봉, 이해 못 할 인사고과, 가끔 욕설도 용인되는 경직된 회사 분위기. 회사는 더 이상 머물고 싶지 않은 곳이 됐다. 내 시간과 노력을 갈아 넣은 직장을 함부로 손절하고 싶진 않다. 고민이 깊어지던 때, ‘노동조합(노조)’이라는 네 글자가 떠올랐다.

노조 만들 결심, 확실히 굳혔나요  

“우리 회사는 노조를 만들면 회사가 없어진대” 오래전부터 회사마다 구전되는 괴담이다. 누군가는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이다. 실제로 노조를 만들어보니 절대 이렇지 않았다”고 한다. 또 다른 누군가는 “사주가 위장폐업 형식으로 없애는 일이 있긴 하다”고 말한다. 노조 결성 후, 사측의 압박도 두렵다. 승진에서 누락되진 않을까, 부당한 지방발령을 받진 않을까. 생각이 많아진다. 정답은 없다. 회사마다 상황은 다르다.

“그 괴담, 우리 회사에도 있었어요. 실제로 노조를 결성하고 보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더라고요. 오히려 노조를 좀 더 빨리 만들지 못한 게 후회돼요.” -지석규 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 전국사무금융서비스노조 신한신용정보지부장

“노조 활동을 이유로 불이익을 주는 건 부당노동행위에요. 엄격하게 법으로 금지하고 있죠. 구성원 대다수가 노조에 참여하면 불이익을 주기도 힘들어요.” -오세윤 민주노총 전국화학섬유식품산업노조 네이버지회장

노조 만들기 첫걸음, 사람 모으기   

사내에 노조 가입을 원하는 직원이 얼마나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노조는 2명 이상 모이면 만들 수 있다. 물론 많을수록 좋다. 확인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직장인 익명커뮤니티 블라인드 사내 게시판에 글을 올리거나, 오픈채팅방을 활용하는 방법도 있다. 친한 사람을 통해 의사를 묻거나 전화를 돌리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건 보안이다. 사측에서 미리 알면 노조 결성이 어려워질 수 있다.
 
“직장 내 여러 사람과 친분을 형성하고 관계를 점진적으로 뻗어 형성, 유지한다면 수월하게 조합을 설립할 수 있어요. 품질, 생산, 자재 등 다양한 부서에서 근무했어요. 이때 맺은 인간관계를 토대로 사람들에게 노조 가입 의사를 묻고 설립을 준비했죠. 매주 사람을 만나 노조 가입 대상 190명 중 160명 찬성을 얻어 지회를 설립했어요.” -김대근 민주노총 금속노조 경기지부 현대모비스 안양지회장

“회사 사람들을 모두 알지 못하잖아요. 우선 은행 각 지점장에게 전화를 돌렸어요. 처우 개선을 위해 노조 설립을 제안했죠. 지점장들이 같이 근무하는 직원들에게 조심스레 의사를 묻고 노조가 필요하다고 설득했어요. 현재 가입 대상의 90%가 노조에 참여하고 있어요.” -용성훈 민주노총 전국사무금융서비스노조 삼호저축은행지회장

“블라인드 사내 게시판에 실명을 걸고 노조를 만들겠다는 글을 올렸어요. 이후 노조 가입 의사를 묻는 익명 설문을 진행했어요. 이와 함께 노조 설립을 준비할 임원진에게는 실명과 소속, 전화번호를 담은 메일을 따로 달라고 했죠. 저를 포함 4명이 모여서 설립을 시작, 2200명 규모의 노조를 만들었죠.” -유준환 LG전자 사람중심 사무직 노조 위원장

복잡한 설립 절차, 꼼꼼히 보고 고민

노조를 만드는 과정에서 준비할 것이 많다. 노조 추진 준비위원회는 최소 3~5명으로 꾸리는 것을 추천한다. 가입대상, 회의, 임원 종류, 조합비 등을 결정하는 노조 규약을 마련해야 한다. 임원을 비롯한 집행부 구성도 사전에 준비하는 것이 좋다. 준비를 완료하면 설립총회를 열고 규약제정, 임원 선출 등 안건을 토의한다. 회의록을 작성하거나 사진을 찍어둬야 한다. 노조 설립신고서를 제출할 때 필요하다. 설립 신고는 신고서와 규약을 구비해 관할 행정관청에 제출한다. 

설립 단계에서 함께 고려해야 할 것은 노조의 형태다.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첫 번째는 상급단체 산하 지부 지회가 되는 것이다. 상급단체는 민주노총과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총) 등이 있다. 설립 과정에서 상급 단체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큰 장점이다. 지부·지회 활동에 어려움이 생겼을 때 연대를 요청할 수도 있다. 설립신고서 제출 등 일부 과정을 생략할 수도 있다.

두 번째는 독립적인 기업별 노조를 설립하는 것이다. 설립신고증을 가지고 자체적으로 사측과 교섭을 벌이거나 쟁의행위에 돌입할 수 있다. 소속된 회사의 중요 안건에만 집중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다만 외부와의 연대가 부족해 활동 동력이 약화될 위험도 있다. 

“처음 노조를 만들 때 막막함에 사무금융노조의 문을 두드렸어요. 전화하니 언제든지 방문하라고 하더라고요. 1년 정도 준비한 끝에 노조 설립일을 먼저 정했어요. 이후 사전에 가입 대상자에게 일사불란하게 연락을 돌려 2~3일 만에 가입을 완료시켰죠. 그리고 설립일 직전까지 보안을 지키다가 노조 설립 안내문을 배포해 활동 시작을 알렸어요.” -지석규 민주노총 전국사무금융서비스노조 신한신용정보지부장

“사무금융노조에서 우리 지역으로 직접 오셔서 구비 서류와 설립총회 회의장 준비까지 도움을 주셔서 수월했죠. 다만 노조 규약을 만들 때는 좀 신경 쓸 게 많았어요. 사무금융노조에서 주신 규약 양식을 우리 회사에 맞게 고치는 작업이 필요했죠. 말이 ‘아’ 다르고 ‘어’ 다르니 단어 하나도 고민하며 써야 했어요.” -용성훈 민주노총 전국사무금융서비스노조 삼호저축은행지회장

“노조를 설립할 때 노무사와 상담하면서 무엇이 필요한지 논의했어요. 실수를 줄이기 위해서요. 그런데 일 처리를 빠르게 진행하다 보니 규약을 제대로 검토하지 못했어요. 나중에 규모가 커진 뒤에 규약을 바꾸려고 했지만, 어려운 점이 많더라고요. 임원 구성, 임원 선출 과정, 조합비뿐만 아니라 규약 수정을 총회에서 할지 대의원회에서 할지도 꼼꼼히 고민해 결정해야 해요. 설립 신고 때도 소재지 등을 잘 따져서 해야 반려되지 않아요.” -유준환 LG전자 사람중심 사무직 노조 위원장

노조는 이제 시작,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어렵게 사람을 모아 만들었지만, 이제부터 시작이다. 설립 후 해야 할 일들이 아직 많이 남아있다. 노조를 만들었다면 세무서에서 고유번호증을 신청, 발급받아야 한다. 고유번호증이 있어야 노조 이름으로 계좌를 개설할 수 있고, 각종 업무를 노조 명의로 처리할 수 있다. 되도록 설립 신고를 마친 후 바로 신청하자.

회사와의 교섭을 통해 노동자의 처우 개선도 이뤄내야 한다. 임금협상부터 뒤떨어진 취업규칙 개선, 비정규직 차별대우 철폐 등 해야 할 일이 많다. 이 과정에서 어떤 것을 우선순위로 요구할지 조합원 의견을 잘 수렴해야 한다.

“조합원과의 소통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정기적인 티 타임과 회식 등 소통하는 창구를 최대한 늘리려고 노력 중이죠. 회사와 교섭 과정에서 주의할 점도 있어요. 회사와 거리 지키기입니다. 불가피하게 회사와 회식 자리가 발생한다면 대접받기보다는 대접을 해서 빌미 줄 일을 만들지 말아야 해요. 세상에 비밀은 없습니다” -김대근 민주노총 금속노조 경기지부 현대모비스 안양지회장

“기존에는 회사에 문제가 있어도 불만 토로밖에 못 했지만, 이젠 노조가 생겨서 바꿔나갈 수 있게 됐어요. 리프레시 휴가와 투명한 인센티브, 포괄임금제 페지, 직장 내 괴롭힘 신고 과정 개선 등이죠. 다만 교섭 과정에서 노조의 요구를 모두 수용해주려는 회사는 없습니다. 조합원의 참여를 잘 끌어내 사용자를 설득할 수 있어야 해요” -오세윤 민주노총 전국화학섬유식품산업노조 네이버지회장

노조 만드는 것 정말 추천할 수 있을까. 인터뷰에 응한 신생 노조 위원장 5명에게 물었다. 가족이 노조를 만든다고 하면 응원할 수 있겠느냐고. 5명 모두 “그렇다”고 답했다.

이소연 기자 soyeon@kukinews.com 기사모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