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15일 K라면 생산 60년 [쿠키칼럼]

한류 힘입어 종주국 일본 누르고 세계 시장 석권

기사승인 2023-09-04 08:4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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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15일 K라면 생산 60년 [쿠키칼럼]
1963년 9월 15일 첫선을 보인 삼양라면. 사진=삼양식품 제공

[쿠키칼럼-이희용]


전 세계 한류 팬들이 첫손에 꼽는 한국 대표 음식은 무엇일까? 김치, 불고기, 비빔밥, 소주? 정답은 라면이다. 수출액(2022년 7억6540만 달러·한화 약 1조122억 원)은 K푸드 가운데 단연 1등이고, 수출 대상국도 143개국으로 가장 많다. 전 세계 시장점유율도 한국 라면이 최고다.

오는 15일은 우리나라가 라면을 생산한 지 60주년이 되는 날이다. 삼양공업주식회사(삼양식품 전신)는 ‘三養라면’이란 이름으로 첫선을 보였다. 포장지에는 닭고기 국물을 상징하는 닭을 그려넣고 몸통 부분을 투명하게 만들어 내용물이 보이도록 했다. 중량은 100g, 값은 10원이었다. 식당에서 김치찌개가 30원 할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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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양라면 포장지 변천사. 사진=삼양식품 제공

포장지 윗줄에 ‘일본 최대의 묘조(明星)식품주식회사와 기술제휴’라고 적었듯이 라면 원조국은 일본이다. 대만 출신의 귀화 일본인 안도 모모후쿠는 국수를 기름에 튀겨 건조시킨 뒤 뜨거운 물을 부으면 원래 상태로 풀어진다는 사실에 착안해 즉석(인스턴트) 라면 개발에 성공했다.

면발은 보통 국수와 달리 꼬불꼬불하게 만들었다. 물과 접촉하는 면을 늘려 빨리 익고, 유통과정에서 잘 부서지지 않을 뿐 아니라, 작은 봉지에 많은 양을 담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젓가락으로 집기 쉽고 맛있어 보인다는 장점도 있었다.

그는 닛신(日淸)식품을 설립하고 ‘닛신 치킨라멘’을 1958년 8월 25일 선보였다. 시작부터 선풍적인 인기를 끌어 식당에서 면을 직접 뽑아 팔던 우동, 소바(메밀국수), 라멘 시장을 급속도로 잠식했다.

초창기 라면은 면에 양념을 가미한 방식이어서 빨리 변질되는 단점이 있었다. 후발업체 묘조식품은 1961년 분말수프를 따로 포장해 끓일 때 넣는 방식을 채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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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라면을 생산하던 삼양라면 공장 전경. 사진=삼양식품 제공

경쟁업체들이 위협해오자 안도는 1971년 세계 최초의 용기라면 ‘컵누들’을 내놓아 새로운 시장을 열었다. 그는 2005년 우주비행사들이 먹는 라면 ‘스페이스 라무’도 개발해 명실상부한 ‘라면의 아버지’임을 과시했다.

삼양식품 창업주 전중윤 회장은 일본 출장길에서 인스턴트 라면을 맛보고 한국에서도 만들어 보급하겠다고 결심했다. 당시 한국의 연간 1인당 국민소득은 104달러여서 굶주린 사람이 흔했다.

미군부대에서 버려진 햄과 소시지 등을 넣고 끓인 5원짜리 잡탕죽(일명 꿀꿀이죽)을 사 먹으려고 남대문시장에서 길게 줄을 서던 시절이었다. 다행히 미국 원조 덕에 밀가루는 구하기 쉬웠다.

정부를 설득해 5만 달러의 지원금을 얻어내고 몸소 묘조식품에서 견습공으로 일하며 라면 생산 기술을 배웠다. 한국에서 젊은 시절을 보낸 묘조식품의 오쿠이 기요스미 사장도 “한국전쟁 특수로 경제 재건에 성공한 일본이 이제는 한국을 도와야 한다”며 협조적이었다. 묘조식품이 쓰던 생산기계 두 대를 헐값에 들여오기로 했다.

나머지 경영진은 수프 제조법 등 핵심 기술 유출을 반대했다. 전 회장이 무거운 마음으로 귀국 인사를 하러 왔을 때, 오쿠이 사장은 은밀히 봉투를 건네며 비행기에서 뜯어보라고 귀엣말을 건넸다. 그 안에는 전 회장이 그토록 알아내고 싶어한 라면 제조의 노하우가 적혀 있었다.

처음 나온 삼양라면은 일본처럼 국물이 싱겁고 뽀얀 편이었다. 1966년 동남아 순방에 나선 박정희 대통령 내외는 현지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고생하다가 삼양라면을 먹고 기운을 차렸다. 박 대통령은 “약간 매운맛이 나면 좋겠다”라고 품평하며 고춧가루를 넣어보라고 조언했다. 그때부터 국물 빛깔이 빨갛게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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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시장을 겨냥한 비빔면, 냉면, 콩국수 등이 대형마트 판매대를 가득 채우고 있다. 사진=농심 제공

한국에서도 후발업체가 등장했다. 롯데공업이 1965년 롯데라면을 내놓은 데 이어 1970년 2월 업계 최초로 인스턴트 짜장면을 출시했다. 그해 10월과 1975년 10월에는 소고기라면과 농심라면을 각각 선보이며 삼양라면을 바짝 추격했다. 1978년에는 사주 형제간 갈등으로 롯데그룹과 결별하고 회사명도 ㈜농심으로 바꿨다.

농심은 사발면(1981), 너구리(1982), 안성탕면(1983), 짜파게티(1984) 등 연속 안타를 터뜨리며 1985년 삼양라면을 제치고 업계 정상에 올랐다. 한국야쿠르트(1983·팔도라면으로 분사), 빙그레(1986), 오뚜기(1987) 등도 속속 시장에 가세했으나 농심과 삼양의 양대 체제를 위협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농심은 1986년 10월 ‘국민 라면’이라고 할 수 있는 신라면을 출시해 1위 굳히기에 들어갔다. 삼양라면은 식용 대신 공업용 쇠기름을 쓴 혐의로 1989년 책임자가 구속되는 ‘우지(牛脂) 파동’으로 결정타를 맞았다. 삼양식품은 8년간의 법정투쟁 끝에 무죄판결을 얻어냈으나 이미 소비자들은 등을 돌린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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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기생충'에서 배우 조여정이 짜파구리를 먹는 장면. 사진=바른손이앤에이 제공

2000년대 들어서는 미역국라면이나 삼계탕면 등 다른 메뉴와 접목한 제품이 쏟아져나왔다. 2011년 팔도라면이 개그맨 이경규의 꼬꼬면을 상품화해 히트하자 한동안 하얀 국물이 유행하기도 했고, 최근에는 불닭볶음면을 비롯한 매운맛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한국은 1969년부터 해외 라면시장의 문을 두드린 끝에 2020년 종주국 일본을 넘어섰다. 1996년부터 해외에 현지 공장을 세우고 세계인의 입맛에 맞는 신제품 개발과 마케팅 다각화에 힘써온 덕이지만 한류 콘텐츠의 인기도 한몫했다.

주인공 이정재가 라면을 부숴 분말수프를 뿌려 먹는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게임’, 이선균 아들이 짜파게티와 너구리를 조합한 ‘짜파구리’를 먹는 영화 ‘기생충’, 아이돌그룹 BTS 멤버 뷔가 각종 라면을 맛보는 tvn 예능프로그램 ‘서진이네’ 등을 본 한류 팬들은 앞다퉈 한국 라면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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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양식품의 까르보불닭볶음면(오른쪽)을 베낀 닛신식품의 야키소바 까르보. 사진=양사 홈페이지 화면 캡처 

이른바 ‘먹방’ 인플루언서들의 단골 메뉴도 한국 라면이다. 미국의 매트 스토니가 불닭볶음면 15개를 먹는 유튜브 영상의 조회 수는 무려 1억4000회를 넘겼다.

한국 라면이 일본 라면을 제친 것은 삼성이 소니를 누르고, 태권도가 가라테를 이긴 것과 맞먹는 쾌거다. 이제는 일본이 한국 제품을 노골적으로 베낀 ‘미투 제품’을 내놓을 정도다. 한국 라면은 이제 세계인의 솔푸드로 자리잡았다. 환갑 이후 행보가 더욱 궁금해진다.

이희용
연합뉴스에서 대중문화팀장, 엔터테인먼트부장, 미디어전략팀장, 미디어과학부장, 재외동포부장, 한민족뉴스부장, 한민족센터 부본부장 등을 역임하고 한국언론진흥재단 경영이사를 지냈다. 저서로는 ‘세계시민교과서’ 등이 있다.hoprave@gmail.com 기사모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