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말하지 못한 비밀 [눈떠보니 K장녀①]

기사승인 2023-10-01 06: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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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말하지 못한 비밀 [눈떠보니 K장녀①]
첫째로서 부담과 책임이라는 이중부담을 안고 있는 K장녀. 사진=권혜진 쿠키청년기자


독일의 철학자 니체는 인간을 여행자에 비유하며 이렇게 말했다. “비참한 여행자는 누군가를 따라가는 인간이며, 위대한 여행자는 스스로 목적지를 선택하는 인간이다.” 한국의 장녀는 가족과 사회의 요구에 목적지를 선택할 겨를도 없이 삶의 여행길에 올랐다. 부모에겐 속 썩이지 않는 1등 자식이 돼야 했고, 동생에겐 든든한 부모 노릇을 해야 했다. 그렇게 위대한 장녀가 되는 대신 자신을 잃어버렸다. 그들은 ‘위대한 여행자’에 가까울까, 아니면 ‘비참한 여행자’에 가까울까. 쿠키뉴스 청년기자단은 맏이로 자란 2030세대 여성을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21세기 한국에서 여전히 유효한 K-장녀(Korea+장녀)의 삶을 조명한다. [편집자주]

2023년의 2030세대 장녀는 과거와 다른 특징이 있다. 부담감과 책임감이라는 이중부담을 겪고 있다는 것이다. 무너진 남아선호사상, 가족 구성의 축소 등 시대가 변화함에 따라 장녀에 대한 지원도 늘었다. 그러나 사회 기대는 여전히 남아 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21세기 K-장녀가 등장했다.

과거 장녀는 희생의 아이콘이었다. 5060세대의 장녀는 장남 혹은 남자 형제에 비해 집안의 지원을 받기 어려웠다. 1967년 초등학교를 졸업한 여학생 중 절반이 중학교를 진학하지 못했다. 1970년 중학교를 졸업한 여학생의 절반만이 고등학교를 진학할 수 있었다. 살림 밑천이었던 장녀는 일찍 경제 활동에 나서 집안 살림에 보탬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시대가 바뀌며 남아선호사상은 옛말이 되었다. 통계청의 2022년 출생·사망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여아 100명당 남아수를 뜻하는 출생 성비가 104.7명으로 나타났다. 이는 1977(104.2)명 이후 45년 만의 최저치다. 셋째 아이 성비 변화는 더 극적이다. 1990년에는 셋째 아이 성비가 189.9명으로 남아가 여아에 두 배에 달했다. 올해의 경우는 105.4명으로 역시 통계 집계 이래 최저치를 기록했다. 남아 선호가 약해지고 양성평등 의식이 강화된 결과로 분석된다.

가족 구조도 변했다. 산업화를 거치며 저출산 기조가 이어졌다. 가구당 자녀수가 감소하며 4인 가구가 대세로 떠올랐다. 통계청이 발표한 2020 인구주택총조사 표본집계 결과를 보면, 이미 낳은 자녀수에 추가 계획한 자녀수를 더한 기대자녀수는 2020년 1.68명으로 1985년 2.5명 대비 0.82명이나 줄었다.

알파걸이 되어야 하는 K-장녀

시대 흐름에 따라 장녀에게도 아낌없이 지원하는 부모들이 늘었다. 한국노동연구원 한국노동패널 7차년도(2004) 자료에 의하면 남아보다 여아에게 더 많은 사교육비를 지출하며 출생 순위가 높을수록 지출되는 사교육비의 규모가 커졌다.

21세기 2030세대 K-장녀는 알파걸이 되어야 한다는 부담을 갖고 있다. 알파걸이란 공부, 리더십 등 다양한 방면에서 남자에게 뒤지지 않는 엘리트 소녀를 일컫는다. 첫째이기에 더 많은 기회와 지원을 받는 이른바 ‘첫째 프리미엄’은 양날의 검이다. 지원을 받은 만큼 잘 해내야 한다는 부담감도 함께 커졌다.

여동생 한 명을 둔 장녀 남다빈(22)씨는 고등학교 시절을 고통스러운 기억이라고 회상했다. 남씨는 3년간 교육비로 1억 가까운 금액을 썼다고 했다. 부모의 권유로 상대적으로 취약했던 수학 과목은 학원과 개인 과외를 병행하며 공부했다. 남씨의 부모는 ‘첫째가 잘해야 동생이 따라 배운다’며 늘 남씨에게 학업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취업을 앞둔 남씨는 지금도 동생 생각이 앞선다. 지원받은 것이 있으니 그만큼 책임감을 느낀다는 남씨는 “길을 잘 닦아서 나중에 동생한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1남 1녀 중 장녀인 이유빈(31)씨도 부모로부터 아낌없는 지원을 받았다. 이씨가 서울에 위치한 대학에 합격하면서, 경기도에 살던 가족이 모두 대학 근처로 이사했다. 이씨가 살던 안양에서 대학교까지 통학하려면 2시간30분이나 걸려 학업에 집중할 수 없을 것 같다는 부모님의 걱정 때문이었다. 이씨는 “덕분에 늦은 시간까지 공부할 수 있었지만, 반대로 시험 기간에 일찍 들어가면 눈치 보이는 것이 있었다”고 말했다. 이씨는 가족, 특히 동생에 대한 미안함과 책임감도 심했다. 온 가족이 서울로 이사 오며 학생이었던 동생의 학교생활 적응 문제가 있었다. 이씨는 “부모님의 전폭적인 지원이 정말 감사하지만, 한편으로는 열심히 해야만 한다는 압박으로 느껴지기도 한다”고 말했다.

그들이 말하지 못한 비밀 [눈떠보니 K장녀①]
1남2녀 중 장녀인 고경아씨의 카카오톡 가족 채팅방. 사진=권혜진 쿠키청년기자


따로 또 같이, 여전한 K-장녀의 무게


최근 학업이나 취업으로 인해 부모와 떨어져 사는 경우가 계속 증가하고 있다. 서울연구원 자료에 따르면, 2021년 서울시 1인 가구는 149만명으로, 서울시 총가구 수(404만)의 약 37%를 차지했다. 1인 가구 연령대별 비중은 20대가 가장 높았다. 혼자 사는 주된 사유는 직장 때문이었다. 2020년 매출액 기준 전국 1000대 기업 중 743개 사가 수도권에 자리 잡고 있을 정도로 일자리가 수도권에 몰려있기 때문이다.

장녀에 대한 역할 기대는 바뀐 주거 형태라는 땅 위에서도 무럭무럭 자랐다. 학업과 일자리 등을 이유로 형제・자매가 나란히 상경한 경우 장녀의 부담은 더욱 커졌다. 따로 살게 된 부모와 자녀 사이의 물리적・정신적 교량 역할을 K-장녀가 맡아야 했기 때문이다.

고경아(28)씨는 지방에서 서울로 대학 진학 후, 취업까지 서울에서 한 케이스다. 동생들이 잇따라 학업을 위해 상경하자 세 남매가 함께 살게 되었다. 고씨는 아직 학생이라 경제 활동이 없는 두 동생을 책임지고 있다. 주거 공간 마련도 고씨의 몫이었다. 남매가 함께 살 집을 마련할 때 고 씨는 부모의 지원을 받지 않고 스스로 해결했다. 자신의 이름으로 대출을 받아 현재 사는 집의 전세 자금을 마련했다. 매달 나오는 이자도 혼자 부담했다.

고씨는 “어릴 때부터 ‘부모님이 없으면 첫째가 부모님의 대신’이라는 말을 듣고 자랐다”며 “세 남매가 함께 살 집을 책임지는 것이 당연히 자신의 몫이라 생각하고 있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금리가 오른다는 소식에 혼자 전전긍긍할 때, 장녀의 외로움을 느낀다”고 했다.

권혜진, 박주아 쿠키청년기자 hannahkei@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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