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아니면 누가 도와”…저당 잡힌 청춘 [자식담보대출②]

-아버지 사업 부도에 9세 때부터 생계 내몰려
-자녀가 집안 가장 역할…각종 핑계로 돈 요구한 부모
-개인회생 신청 등 고통 겪어…대출 거절하니 연락 끊은 어머니

기사승인 2024-01-08 06: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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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양미 300석. 심 봉사가 덜컥 시주를 약속했을 때, 딸 심청의 마음은 어땠을까. 인당수에 뛰어들기 위해 뱃머리에 선 심청. 몸을 던지는 순간까지도 어쩌면 아버지 부탁을 거절하고 싶지 않았을까. 
부모의 빚을 대신 갚는 청년은 2024년에도 존재한다. 적금을 깨 생활비를 보태고, 대출을 받아 부모 빚을 메운다. 부모 자녀 간 모든 금전 거래가 잘못됐다는 것은 아니다. 어떤 부탁은 자녀의 경제 기반을 부수고 회복 불가능하게 만든다. 쿠키뉴스는 지난해 하반기 부모의 금전 요구로 어려움을 겪는 청년들을 취재했다. 돈을 주지 않으면 협박을 듣거나 폭력에 시달린다. 신용불량에 빠져 빚에 허덕이고, 때로는 죽음까지 생각한다. 우리 사회에서는 가정사로 축소돼 드러나지 못했던 이야기다. [편집자주]
“가족 아니면 누가 도와”…저당 잡힌 청춘 [자식담보대출②]
부모의 금전 요구에 시달린 이영진씨는 남들보다 일찍 생계에 뛰어들었다. 늘 공부보다 일이 먼저였다. 사진=박효상 기자


아버지의 사업이 휘청이기 시작한 건 그때쯤이었다. 이영진(34·여·가명)씨가 초등학생이 됐을 무렵. 무섭게 쌓인 빚에 눌려 아버지의 회사가 순식간에 주저앉았다. 부도가 났다. 아버지는 신용불량자가 됐다.

온 식구가 돈을 벌어야 했다. 초등학교 2학년 학생이었던 이씨마저 어른들 틈에 끼어 전단을 돌렸다. 남의 집 현관문에 열쇠 가게 번호가 적힌 스티커를 붙이며 그는 생각했다. ‘돈을 벌 수 있어서 다행이다.’ 얼마 안 되는 돈이라도 있는 날은 하루가 조용히 지나갔다. 그날은 누구도 아버지에게 맞지 않았다.

이씨 기억 속에 공부나 친구는 희미하다. 대신 언제나 일이 있었다. 아르바이트는 끊이질 않았다. 월급 70만원을 받으면 이씨가 쓸 돈 3만원을 빼고, 모두 부모에게 줬다. 한 달에 사흘 이상 쉰 적이 없었다. 중학교만 졸업한 채 돈을 버는 데에 매달렸다.

어렵게 검정고시를 보고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이씨는 22세에 제대로 된 직장을 처음 잡았다. 백화점에 들어갔다. 세 번째 월급을 받자, 어머니가 연락했다. 대출을 받아달라는 이야기였다. 생활비가 없다고 했다. 은행에서 대출이 나오는 사람은 가족 중 이씨뿐이었다. 신용불량자인 아버지,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어머니는 불가능했다. 그렇게 한번 받아준 대출이 화근이었다. 요구는 계속됐다. 이씨는 다섯 차례 대출을 받아 부모에게 줬다.

“가족 아니면 누가 도와”…저당 잡힌 청춘 [자식담보대출②]
지난해 9월 인터뷰 당시 이영진씨의 신용점수. 낮은 신용 점수로 경제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사진=정진용 기자

이씨는 실질적 가장이었지만, 집안 재정 상태는 알지 못했다. 달라는 대로 돈을 건넸을 뿐이다. ‘카드값이 없어.’, ‘병원비 내야 해.’, ‘싱크대 고장났어.’ 나중엔 돈이 필요한 이유조차 듣지 못했다. 이해하지 못할 일도 벌어졌다. 이씨가 돈이 부족해 전전긍긍할 때 어머니는 멕시코, 중국, 필리핀으로 여행을 다녔다.

“가족은 원래 다 그래. 남들도 이렇게 살아.”

이씨를 절망하게 한 건 빚보다 어머니의 말 한마디였다. 건강까지 나빠진 그는 일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와중에도 이씨는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실업급여를 받을 때는 울면서 고용노동부에 전화를 했다. 집으로 우편물을 보내지 말아 달라고 간청했다. 돈이 있다는 걸 알면 어머니가 이씨를 찾을 게 분명했다.

극한 상황은 판단마저 마비시켰다. ‘차라리 내 손으로 신용을 망가뜨려야겠다. 그럼 대출이 안 나올 테니까, 엄마가 더는 괴롭히지 않겠지.’ 결국 이씨는 연체도 안 된 카드값과 대출을 묶어 개인회생을 신청했다.

이씨 이름 앞으로 쌓인 빚 5500만원. 지난해 9월 인터뷰 당시 그의 신용점수는 KCB 474점(상위 96%), NICE 350점(상위 99%)이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저는 현금만 쓸 수 있거든요. 무인상점은 카드밖에 안 되잖아요. 카페나 음식점 키오스크도 현금을 안 받아요. 가게 앞을 서성이다가 발길을 돌려요. 제가 왜 이렇게 됐을까요….”

어머니에게 다시 전화가 왔다. 개인회생으로 대출이 되지 않으면, 청약통장이라도 내놓으라고 했다. 돈을 보내지 않자 어머니는 더는 이씨를 찾지 않았다.

“금방 갚을게 한 번만 도와줘” 악당 부모 탄생기 [자식담보대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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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미 기자 min@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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