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으로의 초대] 최금희의 그림 읽기 (29)

영화 '모뉴멘츠 맨; 세기의 작전'에 등장하는 ‘어린 양에 대한 경배’ 2

입력 2024-03-18 15:5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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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으로의 초대] 최금희의 그림 읽기 (29)
얀 반 에이크, 어린 양에 대한 경배(열린 상태), 1432, 패널에 유채, 겐트 성 바봉 대성당 

중년의 품격을 갖추고 능청스러운 연기를 잘하는 배우 조지 클루니가 각본, 감독 그리고 주연을 한 실화 '모뉴멘츠 맨; 세기의 작전The Monuments men'의 줄거리는 이렇다. 벨기에 겐트 성 바봉 대성당에서 수도사들이 제단화 '어린 양에 대한 경배'를 히틀러의 손아귀에 넘겨 주지 않기 위해 패널을 분리하여 브뤼셀로 가는 트럭에 실었다.

그러나 신부들은 사살되고 트럭은 탈취당했다. 미술사학자 스톡스 교수는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 앞에서 이런 사실을 브리핑하며 예술품을 보호하기 위한 특수부대(모뉴멘트 맨) 창설의 당위성을 설득한다. 

어느덧 나치는 패망하였고, 겐트 제단화가 숨겨진 오스트리아 알타우세 광산은 소련의 점령지가 된다. 소련군 장교 역시 겐트 제단화 사진을 가지고 알타우세로 향하고 있을 때, 패널 한 쪽을 마저 찾지 못한 모뉴멘츠 맨은 다시 광산으로 들어간다. 절체절명의 마지막 순간에 테이블로 쓰인 패널을 마침내 발견하고, 소련군보다 먼저 제단화를 확보하여 겐트 시에 반환하였다. 

부르고뉴의 공작 선량공 필립(Duck of Burgundy, Philip the Good)은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 1390/5~1441)에게 연봉을 주었다. 이는 그의 지위를 나타내는 중요한 지표이다. 그는 화가였지만 외교 임무까지 맡았다. 화가는 권력자와 단둘이 있는 시간이 많기에 밀사로서는 최적의 조건이다. 루벤스도 그랬다. 

플랑드르 도시들은 1400년대 직물 무역을 기반으로, 15세기 이탈리아의 피렌체, 로마, 베네치아에 못지 않은 예술의 중심지로 성장했다. 돈이 모이는 곳에서 예술이 번성한다. 반 에이크는 당시 무역대국에서 거래되는 모피, 실크, 울, 리넨, 가죽, 금 등의 교역 상품을 그렸다.​​ 

​플랑드르 미술의 특징은 정교한 사실주의에 근거하여 실제와 똑같은 모습과 형태로 정직하게 묘사하는 것이다. 또한 종교적인 장면의 배경을 가정적인 장면과 결합시켰으며, 부유한 시민과 가난한 농부를 개성이 드러나도록 묘사한 점이다.

이런 특징으로 나무 판 위에 유화로 그린 플랑드르 미술은 타 지역에 비해 최고로 평가받았다. 

15세기의 화가들은 화학자였다. 그들은 물감을 직접 만들었다. 천연 재료를 갈아서 모르타르를 만들고 유화제인 기름과 섞어 페이스트 상태로 만들었다. 그들은 물감의 충돌은 광택제처럼 보이게 할 수 있었고, 붓자국은 교묘하게 사라지도록 할 수 있었다. 형태와 질감, 명도를 세세히 표현할 수 있었고 그 기법 또한 플랑드르 화가들이 최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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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 마리아 부분(상단 좌측 세 번째 패널) 

성모 마리아의 망토와 푸른 보석은 아주라이트(Azurite, 藍銅石)를 밑에 칠하고 그 위에 라피스라줄리(Lapis lazuli, 청금석)로 만든 군청색을 두 번 덧칠한 것이다. 이 작품에 관해서는 초기의 자료조차 밝혀진 것이 없다. 준보석 등 귀한 안료가 유화의 도입과 함께 평가절하 되었다.

이러한 색들은 1660년경에 검정, 흰색, 빨강, 노랑, 파랑으로 체계적인 정리가 되었다. 단 몇 가지 색으로도 여러 가지 다양한 색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유화 화가들의 혼합 능력 덕분이었다.​

사진으로도 영롱한 광채를 드러내는 진주, 루비, 사파이어 등 보석으로 장식된 호화로운 보관은 순결의 상징인 흰 백합과 장미로 장식되어 있다. 금사로 장식된 초록의 보로 감싼 성서를 읽는 성모는 눈을 아래로 뜨고 있다. 이는 겸손함을 나타낸다. ​​

​16세기 이전의 유럽 회화에서 사용된 물감에 대한 문헌은 거의 없다. 얀 반 에이크보다 한 세대 뒤 화가 디르크 바우츠(Diric Bouts)가 그린 제단화 '최후의 만찬'이 지금도 남아 있다.

다행히 '최후의 만찬'을 어떻게 그릴 것인지 등에 관한 주문계약 내용이 그대로 전해지고 있어, 색의 종류, 물감의 원료 및 가격을 추정해 볼 수 있다. 

​16세기가 될 때까지 이탈리아에서는 그림에 대한 주문계약 때 금과 함께 군청색(라피스 라줄리)을 작품의 가장 중요한 부분에 특별히 지정하여 사용하도록 결정하였다. 밝은 색보다 어두운 색으로 염색하는 공정이 더 비쌌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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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 반 에이크의 또 다른 걸작 '아르놀피니의 부부의 초상'에 등장하는 코스탄자 부인이 입은 초록색 직물처럼, 위 세례 요한은 초록색의 선명한 망토를 입어 눈길을 사로 잡는다. 초록색은 자연을 상징하는 색이다. 

중세의 작품은 본질적으로 색채 감각이 불안정하다. 예를 들어, 녹색과 검은색이 눈을 쉬게 해준다고 설명한 네캄의 '사물들의 성격으로부터'도 있다. 그래서 녹색의 원석 가루는 안연고로도 사용되었다. 섞이지 않는 색상의 순수함은 고대로부터 아주 소중한 것으로 여겨졌으며, 14세기에 색을 혼합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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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 반 에이크, 어린 양에 대한 경배(닫힌 상태), 1432, 패널에 유채, 겐트 성 바봉 대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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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자 요한과 사도 요한(하단 중앙)

그리자이유(Grisaille)란 회색조의 색채만을 사용하여 그 명암과 농담으로 그리는 화법이다. 이 사진만으로 조각인지 그림인지 구별하기란 쉽지 않다.​

왼편의 세례자 요한이 왼팔로 양을 안고 오른손 검지로 양을 가리킨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를 보고 말하였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시다.”​​

요한복음서와 요한계시록의 저자인 사도 요한이 뱀이 담긴 독배를 들고 있다. ‘독이 담긴 술잔에 성호를 긋자 독이 뱀으로 변하였다’는 성서의 기록에서 나온 상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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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양에 대한 경배' 부문

위 그림의 봉헌자 요스쿠스 베이트(Jodocus Vijd)는 당시 겐트 시의 부시장이며 성 요한 교회의 위원이었다.

각각 자신들의 수호성인들 옆에 선 기증자 부부이다. 봉헌자의 늘어진 볼, 움푹 패인 뺨, 꽉 다문 입매 그리고 긴 코와 커다란 귀가 부귀영화를 누리고 신심이 두터운 성실한 사람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빨간색 모직의 드레이퍼리(Drapery; 옷의 주름) 묘사가 뛰어나며, 가장 고가인 ‘소나무 담비 털’로 목과 소매에 트리밍을 둘렀다. 노인의 처지고 굽은 어깨와 무릎, 약간 앞으로 쏠린 자세까지 대단히 사실적이며 치밀하다. 빨간색은 추기경의 색으로 귀한 색인데, 닫힌 상태에서는 봉헌자에게만 칠해져 그의 선행을 강조하고 기억하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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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양에 대한 경배' 부문

이 제단화의 측면 패널 오른쪽에는 봉헌자 요스쿠스 베이트의 아내 이사벨 보르트(Lysbette Borluut)가 고딕식 아치로 된 벽감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다. 살아있는 부부의 생생한 컬러와 사도들의 무채색은 서로 대조를 이룬다. 

수수한 차림새로 미화시키지 않은 자연주의가 플랑드르 미술의 특징이다. 남부 이탈리아의 보티첼리와 라파엘이 그린 여인들과 비교하면 그 차이가 확연히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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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태고지'를 아래에서 찍었더니 마리아가 몹시 어둡게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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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브리엘 대천사는 순결의 상징인 백합을 들고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라며 마리아의 수태를 고지하고 있다. 

수태고지에서 천사의 날개를 묘사한 방식은 화가와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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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태고지를 받는 동정녀 마리아의 머리 위에는 성령이 비둘기로 내리고 있다.

두 손을 교차한 모양은 순종하겠다는 의미이다. 성경의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를 거꾸로 써 놓았다. 이는 하늘에 계신 이에게 전하는 말이기에 위에서 읽도록 배려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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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태고지의 이야기가 전개되는 이곳은 중동의 사막인 나사렛이 아니고, 흰 눈이 쌓인 지붕과 거리에 있는 겐트의 저택이다. 아치로 된 창밖으로 부활을 상징하는 제비가 날고 있다.

​중세의 예술작품은 예술을 그 자체의 아름다움으로 생각하지 않고, 목적이 있는 응용 예술이었다. 그러므로 제단화의 경우 중세인들의 미학적 고려 대상보다 실용성이 중요했다. 그러나 성스러운 대상을 묘사했기에 반드시 아름다워야 했다. 

제단화는 두가지 목적을 충족시켜야 했다.

첫째, 신자들의 신앙심을 높이고 둘째, 기증자의 기억을 유지하여 경건함을 보존해야 했다. 아무 때나 열리지 않고 큰 축제 등 대표적인 예식 때에만 열리는 '어린 양에 대한 경배'를 본 이들에게 그것은 경이로움을 넘어 경외심으로 비쳐졌을 것이다. 당대에 벌써 순례자들이 찾아왔다.

나는 반 에이크의 제단화로 종교가 세상의 중심이었던 중세로 떠나는 시간 여행자가 되었다. <계속>

◇최금희 작가
최금희는 미술에 대한 열정과 지적 목마름을 해소하기 위해 수차례 박물관대학을 수료하고, 서울대 고전인문학부 김현 교수에게서 그리스 로마 신화를, 예술의 전당 미술 아카데미에서는 이현 선생에게서 르네상스 미술에 대하여, 대안연구공동체에서 노성두 미술사학자로부터 서양미술사를, 그리고 미셀 푸코를 전공한 철학박사 허경 선생에게서 1900년대 이후의 미술사를 사사했다. 그동안 전 세계 미술관과 박물관을 답사하며 수집한 방대한 자료와 직접 촬영한 사진을 통해 작가별로 그의 이력과 미술 사조, 동료 화가들, 그들의 사랑 등 숨겨진 이야기, 그리고 관련된 소설과 영화, 역사 건축을 바탕으로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놓는다. 현재 서울시 50플러스센터 등에서 서양미술사를 강의하고 있다. 쿠키뉴스=홍석원 기자 기사모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