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으로의 초대] 최금희의 그림 읽기 (31)

루벤스와 할스의 ‘부부의 초상’은 어떤 점이 다른가?

입력 2024-04-01 09:5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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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으로의 초대] 최금희의 그림 읽기 (31)
페테르 파울 루벤스, 인동덩굴 아래의 예술가와 그의 첫 아내 이사벨라 브란트, 1609~10, 캔버스에 오일, 179x136.5cm, 출처: 알테 피나코텍, 뮌헨

'인동덩굴 아래의 예술가와 그의 첫 아내 이사벨라 브란트'라는 긴 이름이 붙은 이 작품은 이중 초상화이다.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가 그의 약혼자인 이사벨라 브란트(Isabella Brant, 1591~1626)와 부부처럼 야외에서 가까이 앉아 있는 모습으로 그려져, 두 사람이 약혼했음을 공표하는 증서와 같다. 

이탈리아에서 8년간의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대공의 궁정화가가 된 루벤스는 32살이고, 브란트는 18살로 인문학자인 고위공무원의 딸이었다. 성공을 향한 사다리에 올라선 자신만만한 루벤스를 볼 수 있다. 두 사람 모두 최신 유행 의상을 입고 사랑의 정원에서 앞으로 펼쳐질 행복을 기원하고 있다. 

플랑드르 화가답게 화려한 무늬와 직조 방식에 따른 재질감을 잘 묘사한 뛰어난 작품이다. 그 중에도 루벤스가 신은 빨간 스타킹의 광택과 음영으로 볼륨감을 담아낸 모델링이 눈길을 끈다. 그가 올린 오른쪽 종아리엔 수축된 근육의 울퉁불퉁함이 살아있다. 

약혼녀는 큰 보석이 박힌 팔찌를 끼고, 리넨으로 만든 높은 러프와 자줏빛 비단 스커트 등 실크의 광택이 더욱 빛나도록 스커트 자락을 펼치고 앉았다. 루벤스는 오른손을 칼에 얹어 가정을 수호하겠다며 약혼녀보다 높은 자리에서 그녀를 향하고, 동시에 자신이 귀족층에 진입했다는 사실을 은연중 암시하고 있다.​

결혼식은 1609년 10월 3일 벨기에 안트베르펜의 성 미카엘 교회에서 거행되었다. 전신 초상화의 다정한 얼굴로 서로의 애정을 표출하는 두 사람의 오른손이 서로 맞닿아 있다.

이는 로마 시대부터 내려오는 ‘덱스트라룸 융티오(Dextrarum iunctio)’로 둘이 결혼한 사이임을 나타내는 자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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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사람의 흉상이 있는 묘비 상단, 석회암 묘비, 로마 1세기 후반, 이탈리아 북부 파도바 출토, 빈미술사 박물관

덱스트라움 융티오의 다른 사례를 보면, 건축 모형 안에 다섯 사람의 흉상을 위아래 이단으로 배치한 묘비이다. 왼쪽의 남성과 여성은 서로 손을 잡고 있는데, 이는 그리스 로마 문화권에서 결속을 의미하는 동작으로 가족묘에서 이 두 사람이 결혼한 부부임을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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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동덩굴 아래의 예술가와 그의 첫 아내 이사벨라 브란트' 부분

이사벨라는 피라미드 형태로 세공된 다이아몬드 반지를 오른손 집게 손가락에 끼고 있다. 이는 서양 미술의 도상(圖像)에서 불변성을 상징하는 콘스탄티아(Constatia)로, 부부애가 영원하기를 바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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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스 할스, 부부의 초상, 아마도 아이작 아브라함스 마사(Isaac Abrahamsz Massa)와 베아트릭스 반 데 라엔(Beatrix van der Laen), 캔버스에 유채, 1622년경, 암스테르담 라익스 뮤지엄​​

루벤스에 버금 가는 또 다른 거장 프란스 할스(Frans Hals, 1582~1666)의 '부부의 초상'을 이 그림과 비교해 보면 할스의 개성이 더욱 뚜렷이 드러난다. 할스는 17세기 네덜란드 바로크 미술의 거장으로 자연스러운 구성과 활력 넘치는 필치의 초상화로 탁월한 업적을 남긴 화가이다. 

이 행복하게 웃는 한 쌍은 서로 편안하게 가까이 앉아 있다. 이런 식으로 커플 포즈를 취하는 것은17세기 초 매우 이례적이었다. 네덜란드를 제외한 다른 나라에서 초상화의 주인공은 아직도 왕족, 귀족 또는 거상에 한정되었다. 

당시에는 정략결혼이 당연하던 시절인데, 이름으로 보아 유대인인 이 부부는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부인이 손을 남편의 어깨에 올려놓았다. 부부간의 동등한 지위를 나타내 주는 포즈로 당시 네덜란드가 황금시대를 구가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런 중산층 부부의 초상화로 미술의 개인화와 세속화가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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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튤립 피버(출처: 나무위키)

거상이 재력을 바탕으로 미술의 개인화를 누리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영화가 있다.

17세기 암스테르담을 배경으로 한 영화 '튤립 피버, Tulip Fever 2017'이다. 거상 코르넬리스에는 크리스토퍼 왈츠(Christoph Waltz)가 분했고, 그의 젊고 아름다운 아내 소피아 역에는 알리시아 비칸데르이다.

알리시아 비칸데르(Alicia Vikander)는 스웨덴 출신으로 스웨덴이 자랑하는 여배우 잉그리드 버그만의 전기 영화 '그녀, 잉그리드 버그만, 2015'에서 주연을 맡았다. 이것으로 비칸데르에 대한 자국민들의 기대를 보여준다. 

내가 이 배우를 처음 본 영화는 '대니쉬 걸 The Danish Girl, 2016'이었다. 1926년 덴마크 코펜하겐의 풍경화가 에이나르 베게너(에디 레드메인 분)와 서로 영향을 주고받던 야심 찬 초상화가인 아내 게르다로 나왔을 때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에서 캠브리지에서 미술사학을 전공한 에디 레드메인(EddieRedmayne)과 알리시아 비칸데르의 섬세한 연기에 푹 빠져 두 배우가 나오는 영화는 무조건 찾아보고 있다. 

그리고 이들의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 얀은 노스캐롤라이나 예술학교에서 미술을 전공한 매력적인 배우 데인 드한(Dane Dehaan)이다. 문자로만 접하던 암스테르담 황금시대의 구체적인 실상과 이면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시대극이다. 그 작품은 피지도 않은 튤립이 돌연변이일수록 가격이 천정부지로 올라 갔던 튤립 열풍의 실체를 리얼하게 묘사했다. 

​다시 할스의 그림으로 돌아가, 1622년이라는 시대적 배경을 생각해 본다면 이 포즈가 얼마나 파격적인지 알 수 있다. 부인은 남편에게 사랑과 헌신을 주문한다. 남편의 눈에는 사랑이 넘치고 부인은 수줍은 미소를 살짝 띄고 있지만 신뢰와 믿음으로 가득한 사랑받는 여인의 당당한 모습이 자연스레 배어 있다.

그해 4월에 그들의 결혼식을 기념하는 초상화를 주문했다는 것은 화가와 주문자 간에 우정이 돈독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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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의 초상’ 부분

따라서 이 그림의 오른쪽에는 사랑의 정원과 같은 사랑과 헌신에 대한 언급이, 왼쪽에는 네덜란드어로 ‘만센 트루(Mannen trouw)‘또는 남성의 충실함으로 알려진 에린글룸(Eryngium) 엉겅퀴가 포함되어 있다.

어느 미술사학자는 죽을 때까지 열매를 맺는 포도 나무의 얽힌 형태는 신실함에 대한 기대를 표명한 것이라 설명하는데 아무리 봐도 포도나무 같지가 않다. 부부와 상대방에 대한 의무의 도상인 엠블럼처럼 손을 모으는 게 아니라 루벤스를 능가하는 호방함이다. 

​이전 초상화에 풍경이 그려지는 경우는 부와 지위를 상징하는 그들 소유의 영지를 보여주기 위해서다. 17세기 네덜란드 황금시대에 처음으로 풍경화가 독립된 장르로 등장한다. 처음에는 다른 장르의 배경으로만 그려졌다.

다빈치의 '모나리자'도 산과 강을 그렸다. 루벤스는 젬스트 근처 햇 스텐 성(Chateau Het Steen) 전원에서 노년을 한가롭게 보냈다. 그는 자신을 위해 영지에 있는 성당에서 풍경화를 그렸다. 이후 북유럽에서 풍경화가 많이 그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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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의 초상‘ 부분, 에린글룸 엉겅퀴

프란스 할스는 빠른 붓질로 한 번에 휙휙 그림을 그렸다. 남편의 의상을 칠한 부분을 자세히 보면 할스의 붓이 어디로 어떻게 지나갔는지 추적할 수 있을 정도이다. 

스페인에 대항하는 네덜란드 독립전쟁은 16세기 중반에 시작되어 1648년에 공식적으로 끝이나 ‘80년 전쟁’으로 불린다. 사실상 1600년대에 네덜란드의 독립은 기정 사실이었다. 당시 인구당 국민소득이 최고에 달한 국제적인 금융과 무역의 중심지인 암스테르담을 비롯해 하를렘, 위트레흐트, 헤이그, 델프트 등은 네덜란드 경제의 거점이었다. 

할스는 벨기에 항구 도시 안트베르펜에서 태어났다. 유년 시절 개신교도인 그의 부모님은 가톨릭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스페인의 침공을 피해 1585년 네덜란드 서부 하를렘에 정착했고 여생을 그곳에서 보냈다. 

할스는 하를렘 시민들의 생생한 모습과 특징을 포착한 뛰어난 초상화로 이름을 얻었다. 그의 주인공들은 개인 초상화부터 가족, 시민군, 구빈원 이사들을 그린 집단 초상화가 있다. 그는 특히 인물 간의 개성과 관계를 생동감 있게 표현하는 데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두 거장 루벤스와 할스는 플랑드르의 안트베르펜과 하름렘을 중심으로 활동한 화가들이었다. 유독 플랑드르에서는 종교전쟁의 여파가 심해 16세기 피테르 브뤼헐부터 화가들의 삶에 깊숙이 들어온다. 두 화가는 공통적으로 종교전쟁의 소용돌이에서 휩싸였다, 루벤스는 가톨릭 교도이고, 할스는 개신교도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루벤스는 기득권에 들어가 부와 명예를 얻고 싶었다. 그는 몰락한 가문의 아들로서 피나는 노력과 적절한 처신으로 성공을 쟁취했다. 반면, 할스는 술을 좋아했고 인기가 사라진 뒤, 고객이 원하는 그림을 그리지 않아 평생 가난에 시달리다 구빈원에서 생을 마쳤다. 

두 화가는 그림을 공부하는 과정도, 그림을 그리는 대상과 화풍도 판이하게 달랐다. 17세기를 대표하는 바로크의 두 화가는 그림 못지 않게 삶을 대하는 태도로 우리에게 많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렇게 대조적인 두 화가의 그림을 통해 숨은 이야기를 살펴보았다. 그림은 이제 작가의 것도 비평가의 것도 아니고, 그림을 사랑하는 관람자의 것이다. 

◇최금희 작가
최금희는 미술에 대한 열정과 지적 목마름을 해소하기 위해 수차례 박물관대학을 수료하고, 서울대 고전인문학부 김현 교수에게서 그리스 로마 신화를, 예술의 전당 미술 아카데미에서는 이현 선생에게서 르네상스 미술에 대하여, 대안연구공동체에서 노성두 미술사학자로부터 서양미술사를, 그리고 미셀 푸코를 전공한 철학박사 허경 선생에게서 1900년대 이후의 미술사를 사사했다. 그동안 전 세계 미술관과 박물관을 답사하며 수집한 방대한 자료와 직접 촬영한 사진을 통해 작가별로 그의 이력과 미술 사조, 동료 화가들, 그들의 사랑 등 숨겨진 이야기, 그리고 관련된 소설과 영화, 역사 건축을 바탕으로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놓는다. 현재 서울시 50플러스센터 등에서 서양미술사를 강의하고 있다. 쿠키뉴스=홍석원 기자 기사모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