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경] ‘보통사람’ 노태우 임기 시절 경제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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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승인 2021-10-29 06: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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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경] ‘보통사람’ 노태우 임기 시절 경제이야기
노태우 전 대통령.  연합뉴스 제공

[쿠키뉴스] 김동운 기자 = 노태우 전 대통령이 10월26일 향년 88세의 나이로 별세했습니다. 12·12 쿠데타 주도한 핵심인물이면서 민주화 이후 최초의 직선제 대통령이라는 양면적인 평가를 가지고 있는 노 전 대통령은 ‘보통 사람의 위대한 시대’라는 슬로건을 내세웠었죠.

노태우 전 대통령이 1988년 제 13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시기는 한국의 경제성장을 가르키는 말인 ‘한강의 기적’의 최고 전성기때와 시기를 같이합니다. 그만큼 노 전 대통령 시기 한국은 경제·금융 부문에서 많은 변화와 논의가 오고갔죠. 이번에는 그 시절의 주목할만한 경제 이야기를 나눠볼까 합니다.

[알경] ‘보통사람’ 노태우 임기 시절 경제이야기
노태우 전 대통령이 1990년 12월14일 옛 소련 크레믈린궁에서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과 정상회담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제공

소련·중국과의 시장 교류를 이끌어낸 ‘북방정책’

노 전 대통령의 일생 및 정치 행보에 관해선 빛과 그림자가 짙습니다. 하지만 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고 노 전 대통령 시기에 추진됐던 ‘북방정책’은 역사적 재조명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있죠.

북방정책은 노 전 대통령이 취임한지 얼마 되지 않은 1988년 7월7일 ‘민족 자존과 통일 번영을 위한 대통령 특별선언’에서 시작됩니다. 해당 선언문에는 남북교역 문호개방을 시작으로 비군사 물자에 대한 우방국의 북한 무역 용인, 남북 간의 대결외교 종결 등의 내용이 담겨져 있죠. 

중요한 사항은 이때부터 적성국가로 인식되던 공산권 국가, 특히 소련과 중국이라는 거대한 국가와 교역의 물꼬가 트이기 시작했죠. 네티즌들에게 전설이나 재미있는 일화로 전해져 내려오는 ‘불곰사업’도 이때 단초가 마련됐습니다.

한국수출입은행 해외경제연구소에 따르면 한국과 소련 수교 이후 양국의 교역 규모는 교역 첫해인 1992년 1억93만달러에서 2007년에는 100억달러, 2011년에는 200억달러를 돌파하게 됐습니다. 2019년에는 224억 달러까지 늘어났습니다. 이에 러시아는 1999년 한국의 23대 교역국에서 2019년에는 9대 교역국으로까지 부상한 상황이죠.

북방정책의 또다른 핵심인 중국과의 관계는 말할 필요가 없죠. 1992년 8월24일 수교를 맺은 양국의 교역 규모는 지난 20년간 약 36배 증가했습니다. 현재 한중관계가 매우 않좋은 상황이긴 합니다만 2004년 이후부터 한국의 제 1 수출국가는 여전히 중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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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서울올림픽 개회식에 참석한 노태우 전 대통령.   연합뉴스 제공

한국, 본격 ‘자유시장’·‘경쟁체제’ 구축…‘88올림픽 성공’ 신화 써내다

그간 국가 주도 경제성장 시스템이 뿌리깊게 내렸던 한국은 노 전 대통령 시기 본격적인 ‘민간 경제’로의 변화가 진행된 시기입니다. 1988년 12월5일 ‘외환 및 금리자유화’가 시행됐는데요, 금리자유화는 정부 및 금융당국이 금융기관의 금리에 대한 직접규제를 철폐하고 금리가 시장에서 자금수급 사정에 따라 자유롭게 결정될 수 있도록 한 제도를 말합니다.

이같은 규제 완화에 따라 글로벌 금융자본이 본격적으로 한국에 진출하게 됩니다. 해외자본이라 하면 부정적으로 들릴 수 있겠지만, 해외자본 없는 폐쇄적인 경제체제가 만드는 결말이 어떻게 됐는지는 잘 아실겁니다.

이때를 기점으로 본격적인 시장개방이 진행됐습니다. 1988년 외국계 보험사 합작사 및 현지법인이 허용됐으며, ‘자본시장 국제화 계획’을 단계적으로 추진하면서 1992년 1월 외국인들도 한국 주식시장에 직접 투자할 수 있게 됐죠.

88올림픽에 대한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1988 서울올림픽의 경제적 효과는 어마어마하다고 추산됐습니다. 대한상공회의소에 따르면 올림픽 개최로 인한 고용유발 효과는 34만명, 생산유발 효과는 4조7000억원, 부가가치 효과는 1조8000억원 수준으로 추산됐죠. 여기에 그간 후진국으로 인식됐던 한국이 훌륭한 성장을 이뤄냈다는 모습을 전 세계에 인식시켜주면서 한국경제의 인지도를 높이는 데 기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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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 전 대통령.   연합뉴스 제공

‘토지공개념’, 30년 전 이미 논의됐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노태우 전 대통령은 ‘가장 진보적 경제정책’을 펼친 대통령으로도 평가받고 있습니다. 2021년 현재 ‘토지공개념’이 중요한 화두로 떠오르고 있지만, 노 전 대통령 재임 당시 실제로 토지공개념이 적용된 부동산 법안들이 실제로 제정됐기 때문이죠.

토지공개념은 토지의 개인적 소유권은 인정하되, 이용은 공공복리에 적합하도록 하자는 것을 말합니다. 토지시장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할 경우 정부가 토지시장에 개입해야 한다는 의미죠. 토지공개념 조항이 처음 헌법에 들어온 건 박정희 정권 때인 1962년입니다. 이후 1972년 유신헌법 때 내용이 확대됐지만, 조항에만 언급됐을뿐 제대로 된 논의는 진행되지 않았죠.

이후 약 20여년이 지나 1989년 노태우 정부는 ▲토지초과이득세 ▲개발이익환수제 ▲택지소유상한제 등 토지공개념을 구체화한 구체적인 제도를 신설했습니다. 자신의 노력과 무관하게 주변 요인으로 오른 지가 상승분이나 개발이익 등을 국가가 환수할 수 있도록 하는 법이죠. 

하지만 1998년 IMF경제위기 이후 급등세만 보였던 부동산값이 폭락하면서 헌법재판소가 공개념 관련법에 위헌 또는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리면서 당시 제정됐던 법안들은 모두 역사의 페이지로 사라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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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전 대통령 고 노태우씨 빈소. 사진공동취재단

고도성장의 빛 속엔 ‘그림자’ 짙다

이같은 노 전 대통령의 경제정책을 바탕으로 한국은 고도성장을 이어나갈 수 있었습니다. 당시 한국은 연평균 8.5%라는 고속성장을 이뤄냈죠.

다만 고속성장 뒤에는 정경유착과 비리라는 그늘이 짙게 드리워졌습니다. 1991년 무주택자에게 돌아갈 토지를 민간 개발업자에게 특혜 공급한 ‘수서비리 사건’이 터지는데, 수서비리의 핵심인 정태수 한보그룹 회장의 로비 대상에는 노 전 대통령까지 포함돼 있었죠. 이후 한보그룹은 IMF 외환위기의 시초가 되는 ‘한보사태’로 이어지게 됩니다. 또한 당시 추진됐던 기업어음(CP) 금리 우선자유화 등 정책경로의 오판이 기업부실로 이어져 IMF 사태의 일부 원인이 됐다는 평가도 있죠.

또한 ‘노태우 비자금 사건’이라는 거대한 비리도 빠질 수 없습니다. 전직 대통령의 개인비리 차원을 넘어서 정경유착의 표본으로 평가받는 이 사건은 약 4500억여원의 비자금이 조성됐다는 충격적인 진실이 드러나기도 했습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생전 유언으로 “나름대로 최선의 노력을 다했지만 그럼에도 부족한 점 및 저의 과오들에 대해 깊은 용서를 바란다”는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고인의 명복을 빌겠습니다.

chobits3095@kukinews.com 기사모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