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째 위기 여성 청소년 돌보는 ‘소녀돌봄약국’을 아시나요?

2014년 103개에서 현재 225개로 늘어난 서울시 소녀돌봄약국
건강 상담·의약품 지원 이어 보호시설·의료기관 연계까지
“사회안전망 역할…홍보 늘려 많은 청소년에게 도움 되길”

기사승인 2023-06-25 06:05:01
- + 인쇄
10년째 위기 여성 청소년 돌보는 ‘소녀돌봄약국’을 아시나요?
23일 서울시약사회관에서 권영희 서울시약사회장(왼쪽)과 이은경 서울시약사회 여약사회장(오른쪽)이 소녀돌봄약국 운영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사진=신대현 기자

 

# 여학생이었어요. 머리 모양은 부스스했고 화장이 진했어요. 커다란 가방을 지고 약국을 찾아왔는데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어요. 이야기를 나눠보니 경제적으로 여의치 않은 편부 가정에서 제대로 돌봄을 못 받고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해요. 고아원에서 지낸 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수시로 가출을 했고, 학교를 다니기 싫어 아빠와 대립하다가 다시 집을 나왔다고 하더라고요. 전형적인 가출 소녀의 모습을 보였고, 아이의 인생이 어떻게 될 지 걱정스러웠습니다. 소녀에게 가출 상황에서 주의할 점을 설명하고, 몇 가지 조언과 당부를 나눴어요. 이어 건강 상담을 갖고 필요할 만한 약품을 전해준 뒤 서울시립십대여성건강센터 ‘나는 봄’ 이용을 권했습니다. (서울 영등포구 A약국 약사)

# 앳돼 보이고 몸은 날씬한데 배가 나온 여학생이 친구와 함께 약국에 왔습니다. 학생은 낙태를 원했지만, 설득 끝에 ‘나는 봄’을 통해 진찰을 받게 했고 미혼모시설에 들어갔습니다. 몇 달 뒤 산통이 심해졌다는 학생의 문자를 받았고, 다음 날 오전 건강한 아들을 출산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기뻤습니다. 아기용품을 들고 찾아가 축하해줬어요. 미혼모시설에서 산후조리도 잘 마친 것을 확인했죠. 지금도 연을 이어가며 지내고 있습니다. (서울 관악구 B약국 약사)

10년째 서울시에서 위기 여성 청소년들을 돕는 약국들이 있다. ‘소녀돌봄약국’이다. 서울시 성평등기금 공모사업의 일환으로 서울시와 서울시약사회, 나는 봄이 협업하고 있다. 지난 2014년 103개였던 소녀돌봄약국은 현재 225개로 규모가 늘어났고, 어느덧 사업 10년째를 맞았다. 하지만 소녀돌봄약국의 존재에 대해 알지 못하는 시민은 여전히 많다. 안내와 홍보가 강화되길 바라는 마음들이 쌓인다.

기능 확대 위해 20개 청소년시설과 업무협약 

23일 서울시약사회관에서 기자와 만난 권영희 서울시약사회장은 “소녀돌봄약국으로 지정된 약국 절반 이상이 10년째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이 같은 운영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며 “언론과 시민들이 많은 관심을 가져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소녀돌봄약국 약사들은 도움이 필요한 여성 청소년에게 정서적·심리적 안정감을 주고 건강 상담을 해주며, 나는 봄이나 한국미혼모지원네트워크 등 보호시설 또는 의료기관과 연계하는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또 감기약, 진통제, 피임약 등 1인당 월 1회 1만5000원 이내의 의약품을 무료로 제공한다. 미혼모시설이나 서울시 20개 청소년복지시설 등은 여성 청소년들에게 안전한 의약품 사용법을 교육한다. 그동안 사업은 여성 약사 위주로 이뤄지다가 지난해부터 남성 약사들도 참여하고 있다.

권 회장은 “약국은 접근성이 좋고 심리적으로 편한 공간이기 때문에 가출 여성 청소년들이 부담을 덜고 찾을 수 있는 공간이 된다. 이들을 이해하고 보듬어줄 수 있는 상담자가 돼줄 수 있다고 생각한 약사들이 모여 사업을 시작했다”며 “지난 2월에는 소녀돌봄약국의 기능을 확대하기 위해 서울시 20개 청소년복지시설과 업무협약을 맺었다”고 설명했다.

약국을 찾는 위기 여성 청소년들을 돌보면서 도움이 되는 상담을 하기 위해 소녀돌봄약국 약사들은 매년 따로 교육을 받고 있다. 최근에는 소아청소년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와 한부모가족지원센터장을 초빙해 유익한 시간을 가졌다.

권 회장은 “일반 약사들은 가출 청소년의 생활 패턴을 잘 모른다. 또 화장을 진하게 하거나 어른스러울 경우 가출 청소년인지 아닌지 구분하기도 어렵다”며 “서울시약사회는 소녀돌봄약국 약사들이 하나의 사회안전망으로 기능할 수 있도록 전문 강사진과 함께하는 워크숍을 마련하는 등 상담 능력 향상을 지원하고 있다”고 했다.

“위기 여성 청소년 지원 방안 논의됐으면”

소녀돌봄약국 약사들은 약국을 찾는 위기 여성 청소년에게 언제든 도움을 줄 준비가 돼 있지만, ‘소녀돌봄약국이 있다는 것조차 몰랐다’는 말을 들을 때면 힘이 빠진다고 한다.

서초구에서 소녀돌봄약국을 운영하는 이은경 서울시약사회 여약사회장은 “서울시 각 구마다 소녀돌봄약국이 골고루 분포돼 있고, 소녀돌봄약국이라는 것을 알리는 현판이 지정된 약국 입구마다 붙어있지만, 모르는 사람이 많다”며 “서울시약사회 홈페이지에서 소녀돌봄약국 소개와 위치를 안내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회장은 “소녀돌봄약국 운영에 대한 서울시 차원의 홍보가 이뤄지길 바란다”며 “약사회와 서울시가 위기 여성 청소년 지원 방안을 논의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서울시는 소녀돌봄약국의 필요성에 대해 공감했다. 공모사업의 일환이다 보니 특정 사업에 힘을 실어주는 것이 형평성에 어긋날 수 있다는 우려도 있지만 약사회의 요청이 있다면 지원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서울시 여성가족정책실 관계자는 “약사회가 서울시에 요청하면 관련 시설이나 단체와 연결해줄 수 있다”며 “지원이 필요하다면 적극적으로 검토해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겠다”고 전했다.

한편 정부는 오는 26일부터 학교 밖 청소년 3000여 명을 대상으로 학업중단 시기와 이유, 신체적·정신적 건강 상태, 경제 상태, 가족관계, 지원기관 인지도 및 이용 경험 등을 조사할 계획이다.

박난숙 여성가족부 청소년가족정책실장은 “이번 실태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새로운 정책 수요를 발굴하고, 청소년 위험요인에 대한 대응을 강화해 나가겠다”고 강조했다.

“언제든 소녀돌봄약국을 찾아주세요”

이은경 서울시약사회 여약사회장은 위기 청소년들이 소외되지 않게 보살피고 나쁜 길로 가지 않도록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개입해야 한다고 피력했다. 더불어 약사들도 힘을 보태겠다고 말했다.

이 회장은 “전문가이자 친근한 동네 어른으로서 약사들이 위기 청소년들을 위해 어떤 역할을 더 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다. 무섭고 급하고 정말 힘들 때 혼자 고민하지 말고 약국을 찾아 달라”고 당부했다.

권영희 서울시약사회장은 청소년들에게 직접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청소년 시기는 여러 가지 도전과 고난의 시기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러분들이 강하고 빛나는 별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현재의 어려운 상황이 장기적인 성장과 행복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든 희망을 잃지 않길 바라며, 소녀돌봄약국은 여러분의 성장과 행복을 응원하고, 꿈을 이루고 더 나은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응원하고 있습니다. 힘들고 지쳐서 포기하고 싶을 때 꼭 기억해주세요. 당신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언제든 소녀돌봄약국을 찾아주세요.”

신대현 기자 sdh3698@kukinews.com

10년째 위기 여성 청소년 돌보는 ‘소녀돌봄약국’을 아시나요?
기사모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