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부 대상에서 ‘지지 법안’으로…의료공백에 부상한 간호법

기사승인 2024-03-12 11:00:02
- + 인쇄
거부 대상에서 ‘지지 법안’으로…의료공백에 부상한 간호법
지난해 5월 윤석열 대통령이 간호법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하자 대한간호협회는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 일대에서 이를 규탄하는 총궐기대회를 개최했다. 사진=임형택 기자

지난해 윤석열 대통령의 재의요구권(거부권) 행사로 무산됐던 ‘간호법’ 제정이 다시 급물살을 타고 있다. 직역 간 갈등의 소지가 크다며 미온적이었던 정부와 여당이 긍정적 신호를 보내며 간호계의 기대감도 높아진다.

12일 간호계에 따르면 간호법이 되살아날 가능성이 커졌다. 지난 8일 대한간호협회(간협)는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그동안 간호사의 업무 범위는 법으로 정해지지 않아 사각지대에 있었다”라며 “정부가 추진하는 지역의료 강화와 의료사고 안전망 구축을 뒷받침하고, 논란의 여지를 없앤 새로운 간호법을 추진할 것”이라고 밝혔다. 현재 정부는 전공의 집단 사직에 따른 의료공백을 메우기 위해 전문간호사와 전담간호사(PA간호사), 일반간호사를 구분해 일부 간호사들이 의료행위를 할 수 있도록 규정한 ‘간호사 업무 시범사업’을 진행 중이다.

간호사의 업무 범위 규정과 처우 개선 등을 담은 ‘간호법 제정안’은 지난해 4월 더불어민주당 주도로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바 있다. 당시 대한의사협회(의협)와 대한간호조무사협회(간무협) 등 보건의료계 직역단체들의 거센 반발 속에서 결국 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가 이어졌다. 이후 5월 본회의에서 재표결을 진행했으나 재적 인원 과반수 출석, 출석 의원 3분의 2 이상 찬성이라는 요건을 넘지 못하며 폐기됐다. 

간호법 제정안은 국회에 재발의 됐다. 수정된 간호법 제정안을 보면, 의협이 “간호사 단독 개원이 가능해질 것”이라고 우려했던 제1조의 ‘지역사회’ 문구를 ‘보건의료기관, 학교, 산업현장, 재가 및 각종 사회복지시설 등 간호 인력이 종사하는 다양한 영역’으로 바꿨다. 간무협이 “간호사와 간호조무사의 학력 제한 차별”이라고 반발했던 ‘고등학교 학력’ 규정은 ‘고등학교 졸업 이상 학력 인정자’로 수정됐다. 또 간호사의 권리에 ‘무면허 의료 행위 지시 거부권’을 명시해 관련 지시 거부에 대한 징계 등 부당한 처우를 받지 않도록 규정했다.

전공의 파업 장기화…달라진 정부·여당 분위기

간호법 제정안이 재발의 됐을 때만 하더라도 관심은 적었다. 하지만 최근 분위기가 역전됐다. 정부의 의과대학 입학 정원 확대 정책에 반발한 전공의들의 파업이 장기화 조짐을 보이면서 의사의 진료 독점을 깨야 한다는 분위기가 조성됐고, 이를 위해 간호사에 힘을 실어줄 필요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정부는 조심스럽지만 성큼 다가선 모습이다. 한덕수 국무총리는 지난 8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주재한 ‘의사 집단행동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회의에서 “간협이 새로운 간호법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며 “정부는 국민 보건 체계를 강화하는 의료개혁에 간호사의 의견을 경청하고 반영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민수 보건복지부 제1차관은 이날 브리핑에서 “그때(지난해 5월) 간호법이 제기됐을 때 몇 가지 불가 사유를 제시한 것이 있는데, 간호법이 재추진되려면 그게 해소돼야 법안으로 성안이 될 것”이라며 “그것이 기본적인 입장”이라고 설명했다.


거부 대상에서 ‘지지 법안’으로…의료공백에 부상한 간호법
전공의 사직에 따른 의료현장 혼란이 장기화 되는 가운데 서울의 한 대학병원 의료진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사진=임형택 기자

정부와 같은 기조를 유지한 여당도 입장 변화를 보였다. 같은 날 유의동 국민의힘 정책위의장은 입장문을 통해 “새로운 간호법은 현재 윤석열 정부가 추진하는 ‘지역의료 강화, 필수의료 육성’이라는 의료개혁을 뒷받침하는 것이어야 한다”라며 “구체적 제도화 방안에 대해선 간호계와 의료계, 보건 전문가, 의료 소비자인 국민의 의견을 경청해 가며 심도 있게 논의하겠다”고 전했다.

야당은 “간호법이 제정됐으면 현 의료 위기 상황에 더 능동적으로 대응했을 것”이라며 정부·여당을 압박했다. 홍익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지난달 28일 제93회 간협 정기 대의원총회에서 축사를 전하며 “전공의 파업으로 의료공백이 발생했고 현장에서 많은 업무 부담이 생기고 있다. 이런 상황 자체가 간호법 제정이 필요하다는 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면서 “책임 있게 정부·여당과 협의해 간호법을 제정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강조했다.

타 직역 반발·21대 국회 임기 ‘변수’

다만 타 직역 반발의 불씨가 여전히 남아 있다. 의협은 지난 7일 언론 브리핑에서 간호법 제정과 관련해 “불법 의료행위 양성화”라며 “제대로 자격도 갖추지 못한 간호사에 의한 불법 의료행위가 양성화되면 의료인 면허 범위가 무너지면서 의료 현장은 불법과 저질이 판치는 곳으로 변질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윤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해 놓고 제정을 재검토하는 데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적지 않다. 이준석 개혁신당 대표는 지난 8일 SNS를 통해 “간호법에 대해 호기롭게 거부권 행사하던 모습은 어디 가고, 이제 의료공백을 핑계로 간호법 제정을 검토한다고 하는 것인가”라며 “이럴 거면 거부권을 왜 사용했나. 그저 칼집에 있는 칼을 한번 휘둘러보고 싶으셨던 것인가”라고 짚었다.

5월 말 21대 국회가 임기 종료를 앞두고 있어 제정안이 자동 폐기되고 원점에서 논의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익명을 요구한 한 간호계 인사는 쿠키뉴스와의 통화에서 “지금 간호법은 간호사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카드이자 동시에 의사들을 압박하는 카드로 쓰이고 있는 것 같다”며 “이번 국회 회기 안에 간호법이 통과될 것 같지만 희망사항에 가깝다”고 전했다.

신대현 기자 sdh3698@kukinews.com


거부 대상에서 ‘지지 법안’으로…의료공백에 부상한 간호법
기사모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