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공백 두 달째, 병원에 남은 사람들

기사승인 2024-04-05 06: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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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공백 두 달째, 병원에 남은 사람들
의료공백이 장기화 되면서 일부 병원들이 비상경영 체제에 돌입한 가운데 남은 의료진과 직원들의 고충이 커지고 있다. 사진=곽경근 대기자

전공의 집단 사직과 그에 따른 의료공백이 두 달째 이어지고 있다. 주 52시간 근무를 선언했지만 환자를 저버릴 수 없어 진료를 보는 교수도, 전공의들의 빈자리를 힘겹게 채우고 있는 간호사도, 병원 경영이 어려워 무급휴가에 내몰린 일반 직원들까지. 의료현장에 남은 이들은 “더 이상 버티기 힘들다”며 조속한 사태 해결을 바란다.

4일 의료계에 따르면 의료 인력 이탈로 진료·수술이 줄고 환자 수가 급감하며 일부 병원들이 비상경영 체제에 돌입한 가운데 남은 의료진과 직원들의 고충이 커지고 있다.

비상경영 들어간 병원들

서울의 ‘빅5 병원’(서울대·서울아산·세브란스·삼성서울·서울성모병원) 중 연세의료원과 서울아산병원에 이어 서울대병원도 비상경영 체제로 전환했다. 서울대병원은 전공의 사직 기간이 길어지면서 간호사 등 직원들의 무급휴가 신청을 받고 있다. 서울아산병원은 최근 직원들의 무급휴가 기간을 최대 한 달에서 100일까지 늘렸다.

직원들은 당장 생계를 걱정한다. 서울지역 전공의 수련병원 노동조합 대표자들은 지난 1일 서울 세브란스병원 앞에서 합동 기자회견을 열고 “병원과 의사에게 귀책사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노동자가 임금이 깎이면서 무급휴가를 가야 하나”라고 호소했다. 이어 “사태 해결을 위해 병원이 하는 노력은 현장을 묵묵히 지키며 헌신하고 있는 보건의료 노동자들을 강제 무급휴가로 내몰고 인건비를 줄이려 하는 것이 전부다”라고 지적했다.

고용불안에도 시달리는 실정이다. 이경민 보건의료노조 서울아산병원지부장은 “진료 축소로 인해 기한 없는 무급휴가를 강요받고 있고, 임금체불과 구조조정 심지어 휴업이나 폐업을 하는 것 아니냐는 말도 심심치 않게 나오고 있다”며 “3월 입사 예정이던 예비 노동자들은 무기한 입사 연기 통보를 받았고, 재계약을 앞둔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일방적 계약 해지를 당해 병원을 떠나고 있다”고 전했다.

뾰족한 수가 없는 병원 경영진은 올해 예산 계획을 전면 재검토하기 시작했다. 김영태 서울대병원장은 지난 2일 ‘서울대병원 그룹 교직원 여러분께’라는 글을 통해 “올해 배정된 예산을 원점에서 재검토해 비상진료체계가 무너지지 않도록 유지하고, 최대한 효율적으로 집행하겠다”고 공지했다.

의료공백 두 달째, 병원에 남은 사람들
서울 시내 한 대학병원에서 환자들이 진료를 기다리고 있다. 사진=임형택 기자


비상경영 체제에 들어가지 않은 병원들의 위기감도 고조되고 있다. 인천 A상급종합병원 관계자는 “전공의들이 큰 역할을 해주던 수술 등은 한 달 전부터 축소됐지만 다행히 아직까지 교수님들이 남아 당직을 서고 진료를 하고 있어 크게 문제 될 건 없다”면서도 “사태가 더 길어지면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연세의료원 관계자도 “환자, 수술, 진료 모두 계속 줄어들고 있는 상태다. 지난달 교수님들이 당직을 빡빡하게 섰는데 육체적·정신적으로 한계가 오는 것 같다”며 “전공의가 많았던 큰 병원일수록 어려움이 크다”고 토로했다.

지역 병원의 상황 역시 다르지 않다. 충북대병원 교수들은 5일부터 외래진료 축소에 들어간다. 충북대 병원·의대 비상대책위원회는 “의료진의 고갈된 체력을 보충하고 소진으로 인한 의료 사고를 막기 위한 부득이한 조치다”라고 설명했다. 전북대병원 교수들도 주 52시간으로 근무 시간을 줄였고, 경상국립대병원은 응급·중증환자에 집중할 수 있도록 진료과별 특성에 맞춰 진료 시간 등을 조율하고 있다.

의료공백이 생긴 3차병원(상급종합병원) 대신 2차병원(종합병원)을 찾는 환자들이 늘면서 종합병원 병상도 포화 상태에 이르렀다. 서울 관악구 소재 종합병원인 에이치플러스 양지병원은 병상 가동률이 90~95%에 육박한다. 양지병원 관계자는 “사태가 장기화 되면서 응급실을 찾는 환자가 많이 늘고 병상 가동률이 올랐다”며 “초응급을 요하는 뇌 처치의 경우 병상이 포화되면 환자를 받을 수 없어 문제가 생길 수 있다. 빨리 사태가 해결돼야 한다”고 짚었다.

의료공백 두 달째, 병원에 남은 사람들
전공의들이 떠난 의료현장을 남은 의료진이 지키고 있다. 교수 상당수는 여전히 병원에 남아 진료를 이어가고 있다. 사진=곽경근 대기자


“환자들 덕에 버틴다”

의대 교수들은 지난 1일부터 입원·외래 진료, 수술 등 근무 시간을 법정 근로시간인 주 52시간으로 줄였다. 연속 당직에 밀려드는 환자들로 인해 교수들이 물리적·체력적 한계가 왔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교수 상당수는 여전히 병원에 남아 진료를 이어가고 있다. 눈앞의 환자를 저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익명을 요구한 서울 소재 상급종합병원 이비인후과 B교수는 “다들 ‘더 이상 못하겠다’고 말하지만 환자들에 대한 애정 때문에 과로로 여럿 쓰러지는 일이 생기지 않는 한 어떻게든 버티려고 할 것”이라며 “저도 지금 심한 감기에 걸려서 진료가 힘든 상황이지만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고 전했다.

B교수는 사태가 장기화 되는 것도 두렵지만 더 두려운 것은 그동안 쌓아 올린 환자와 의사 간의 신뢰가 무너지는 일이라고 했다. 그는 “30년 전 레지던트 시절에는 환자들이 고마워하는 모습을 보며 새벽 1시에 잠이 들어 4시에 일어나도 좋았던 때가 있었다. 현 사태를 겪으며 그때의 느낌을 다시 받고 있다”며 “병원에 남아줘서 감사하다고 인사하는 환자들을 마주하며 버티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 사태가 끝나더라도 의료계를 바라보는 국민들의 시선이 좋지 않을 것 같아 걱정된다”며 “의사를 그저 하나의 직군으로만 바라보면 한국 의료의 밝은 미래는 없다. 의료개혁을 통해 의사와 환자 관계가 올바른 방향으로 재정립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간호사들은 전공의가 떠난 빈자리를 채우며 환자·보호자와의 갈등에 신음하고 불법의료행위에 노출되고 있다. 서울 소재 상급종합병원 심장내과에서 근무 중인 C간호사는 “원활한 진료를 위해 교수님들의 일부 업무를 돕고 있지만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 많다. 하지 말아야 할 전공의들의 업무까지 대신하고 있다”면서 “타 직종 직원들과 서로 도와가며 어려운 상황을 헤쳐 나가고 있다. 하루빨리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왔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신대현 기자 sdh3698@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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